퇴사 후 아내는 한 달간의 달콤한 휴식을 가졌습니다. 평일 아침 휴대폰 알람 없이 늘어지게 자기도 하고, 코로나로 인한 출국금지도 마침 끝나 해외로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그때야말로 '성인이 된 이후 아무 고민, 걱정 없이 쉬어본 유일한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이전 글을 보면 아시겠지만 그녀의 퇴사 후 계획은, '꽃집'을 차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난 후, 꽃집 사장님이 되기 위한 과정들을 밟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매물 찾기'였습니다. 당시 우리의 집은 삼각지역 근처에 있었는데 역을 기점으로 1Km, 3Km 멀게는 10Km 범위에 있는 지역들 중 가게를 차릴만한 후보지들을 리스트업 한 후, 고속터미널 꽃 도매시장과의 거리를 고려하여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처음으로 본 매물은 효창공원역 근처에 있던 신축 건물 1층의 작은 8평짜리 공간이었습니다. 위층으로는 가족들이 사는 주택이었는데, 1층에 자투리 공간이 남아 임대를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첫 매물을 보자마자 아내는 실감했다고 합니다. '어떤 곳이 꽃집을 하기에 좋은 입지일까?'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만 있었지, 그녀가 생각하는 꽃집의 이미지와 방향에 어떤 요소가 가장 중요한지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요 타깃 고객층을 고려했을 때 유동인구가 중요한 지, 접근성이 중요한지 등등 머릿속 떠오르는 질문들에 전혀 답을 할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임대료가 싸게 나왔다는 중개인 분의 말에, 첫 창업이니 만큼 비용 부담을 줄이면 좋겠다며 말을 하다가도, 공간이 너무 작아 플라워 클래스는 못할 것 같다며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시작의 막연함과 혼란스러움 속에 그녀는 첫 발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어떤 곳이 입지로 적합할지에 앞서, 아내는 '내가 원하는 꽃집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동인구가 많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주 들를 수 있는 로드샵 형태의 꽃집인지, 접근성은 좋지 않지만 분위기 있는 골목에 감각 있는 인테리어로 꽃 디자인이 더 돋보일 수 있는 꽃집인지, 매출이나 사업성 같은 현실적인 부분들로부터 얼마나 본인이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했습니다.
동시에 계속 매물 찾기도 이어졌습니다. 용산구를 시작으로 마포구, 서대문구 등에 있는 주요 거점 지하철 역 근처에 나온 매물들을 온라인상에서 훑어보고 임대료나 공간 느낌이 괜찮다 싶으면 찾아가서, 매물 주변 상권이나 유동인구, 분위기 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식이었죠.
한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과정들이 한 달이 넘어서도 계속되자, 그녀의 마음에 불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퇴사로 인해 주어졌던 자유가 이제는 어딘가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소외감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가정을 같이 꾸려가는 동반자로서 제게도 눈치가 조금씩 보이는 거 같았습니다. 그간의 고생을 생각하면 당분간은 충분히 쉬어도 좋다고 말해도, 그녀의 입장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제가 출근을 하고 나면, 침대의 비어있는 옆자리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동시에 미안함이 자꾸 자기 마음을 찌른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불안은 점점 심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아내가 퇴사한 지도 세 달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십 수개의 매물을 보았지만, 그녀 마음에 드는 매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게 완벽한 매물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만서도, 결국에 직관적으로 '촉'이 와야 되는데 그 느낌이 오는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불안은 두려움으로 바뀌어가는 듯했습니다. 앞으로도 괜찮은 매물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벌어놓은 돈과 퇴직금이 다 떨어진다면? 여러 부정적인 생각들이 자꾸만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었으나, 그때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정체된 상황에서 겨울의 매서운 바람과 추위는 그녀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12월의 그 어느 날에도 그녀는 초록창 사이트 매물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우선순위로 생각했던 지역들은 포기한 지 오래여서, 적당한 임대료와 집으로부터 너무 멀지 않은 거리 그리고 무난한 느낌의 공간이라면 어디든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느 역 근처 매물 하나가 그녀의 눈에 띄었습니다. 무척이나 눈이 많이 온 날이었는데, 점심을 먹고 그곳에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곧 있을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고 우울한 기분을 달래줄 겸, 그날은 근사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음식도 맛있고 눈이 쌓인 창밖도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신경은 온통 그날 방문할 상가 1층 공간에 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오늘도 별로면 어떡하지?' 저는 답했습니다. '올해는 안식년이라 생각하고, 내년에 다시 또 찾으면 되지.'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 기다림의 시간이 길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점심을 마치고 매물이 위치한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역 출구로 나와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골목에 눈처럼 하얀 건물이 하나 보였습니다. 중개인 분이 말씀하시기를, 오래된 구옥 빌라를 상업용으로 리모델링 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공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터라, 상가 공간은 모두 공실이었고 페인트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건물 구조가 특이했습니다. 경사가 있는 언덕길에 위치한 건물이라 상가 1층 입구가 철제 계단으로 반 층 정도 올라가야 했는데, 올라가면 화장실을 가운데 두고 101호와 102호로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로 한 101호는 골목길 쪽으로 큰 통창과 길쭉한 세로 창이 위치해 있었고, 면적은 11평 정도로 내부 벽과 천장 모두 하얀색으로 페인트칠되어 있었습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공간을 보는 그녀의 눈이 반짝였던 것 같습니다. 나에게 '처음으로 꽃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공간이야.'라고 말하고는, '계약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속삭이더군요.
그동안의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고민은 길지 않았습니다. 세 달 동안 여러 공간을 봐왔던 그녀의 경험들이 결정에 힘을 보태준 듯했고, 방문한 날로부터 일주일 후 그녀의 생일이었던 22년 12월 23일. 마침내 부동산 임대차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공간의 첫 임차인이었고, 그녀에게도 그 공간은 자기만의 첫 '업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