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린 주치의 선생님의 제안
이후 회사를 퇴사하고 자유인이 되었지만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병은 낫지 않았고 법적 싸움의 기다림은 끝이 없었다.
그렇게 자살충동이 심해진 어느 날, 밤새 어떻게 죽을지 방법만 검색하다 날이 밝았다. 나는 평소처럼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렸다.
오늘 죽더라도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한때 내가 죽더라도 주치의이신 J선생님은 슬플까. 아니, 내가 죽었다는 게 전해지긴 할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선생님이 나를 무관심하게 대하진 않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선생님과 환자는 짝사랑 관계이기 때문이다. 주치의 선생님은 자살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가족보다 더 잘 아는 존재였으나 반대도 과연 그럴까. ‘선생님은 나 말고도 환자가 많을 텐데 나 같은 거 하나에 신경을 쓰시긴 하실까’라는 생각이 들면 괜히 서운해지곤 했다.
그래도 내가 이 생을 마감한다면. 그동안 나를 돌봐 준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싶었다. 내가 죽겠노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고 중증 우울증 환자를 수 없이 봐온 J선생님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좀 어떠셨어요?”
“밤새 죽는 방법만 찾다 왔어요.”
늘 단정한 선생님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져 보였다. 내가 왜 죽고 싶은 지, 죽어야만 살 것 같은지 듣던 선생님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병원이 좀 멀어도 괜찮은가요?”
“저 병원 바꿀 생각 없는데요.”
“그게 아니라… 입원하시죠.”
입원이라니. 그동안 ‘자살 사고’라는 단어가 진단서에 빠지지 않았고 실행에 옮길 정도였지만 나 정도가 입원씩이나 해도 될까, 내가 너무 과장해 얘기해 선생님이 과처방하시는 건 아닐까 자기 검열에 들어간 사이 주치의 선생님의 말이 이어졌다.
“거리가 조금 되지만 지금 입원 의뢰할 수 있는 병원이 있어요. 지금 연락해 보니 병동이 있어서 당장도 가능하다네요. 언제 가시겠어요?”
입원을 할지 말지의 고민은 뛰어넘은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나 정도의 환자도 입원을 받아주느냐’와 같은 질문 등을 이어가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주치의 선생님 방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생각지도 못 한 일이었지만 기다렸던 일인 마냥 흔쾌히 입원을 결정했다. 가족을 설득해야 했지만 죽기 직전에 못해볼 것이 뭔가 싶었다. 당시 내가 회사를 쉬니 집안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압박을 가지며 스스로 괴롭혔으므로 모든 것에서 도망갈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입원은 나의 막연한 로망이었다. 입원할 정도로 다치거나 아픈 건 물론 나쁜 일이지만, 집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괴로워하는 동안 나는 가만히 누워서 때 되면 남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밤이 되면 편안히 잠이 들고 또 아무런 할 일 없이 아침을 맞이하는 입원생활을 꿈꿨던 거 같다. 그게 정신과 병동일 거라곤 상상치 못 했지만.
물론 ‘정신과 병동에 우울증, 자살 위험으로 입원’ 이 말이 주는 무게 때문에 남편의 만류 끝에 동의를 받고도 망설였다. 조금 전까지 죽음을 계획해 놓고도 앞으로 내가 계속 살아간다면 이 꼬리표가 내 발목을 잡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소심한 인간. 이렇게 자책을 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듯 병원생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한때 내가 죽고 나면 엄마가 내 집을 정리하며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곤 했다. 엄마한테 죽은 딸 유품 정리를 시키는 것도 불효 끝판왕인데, 내가 끌어안고 살던 잡동사니는 또 얼마나 많은지. 우리 엄마라면 내 짐은 직접 치우겠다고 나설 것 같은데. 딸 생각에 울다가도 살아생전 내 청소와 정리 실력에 화가 치밀지는 않을까 한 없이 미안해졌다. 그래서 꼭 내 살림은 스스로 정돈하고 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지금이 그 기회였다.
주치의 선생님은 한 두 달 정도를 입원 기간으로 제안하셨다. 하루가 일 년 같던 무렵이라 편도 티켓만 가지고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되는 대로 잡동사니를 버리고 또 생활용품마다 잘 보이게 ‘비상약’, ‘목욕용품 여분’, ‘강아지 사료 패드’ 등의 글씨를 굵은 펜으로 큼지막하게 썼다. 그렇게 퇴사생도 취준생도 주부도 아닌 모든 의무를 벗은 자유의 시간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