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메이커 1

단편소설 <시작 못한 인생>

나는 인생을 프린세스 메이커로 배웠다. 프린세스 메이커는 입양한 딸을 열 살에서 열일곱 살까지 키우는 게임이다. 잘 키워서 왕자와 결혼시키면 프린세스가 되지만, 더 잘 키워서 왕자에게 올인하지 않으면 여왕이 되는 게임.


첫 팔 년은 나 역시 부모의 딸이었기에 프린세스를 키우면서 나 역시 키워졌다. 그 후로는 내가 나를 입양해서 더 잘 키워보려고 했다.




시즌 1은 열여덟 살에서 스물다섯 살이라고 하자. 나는 초보 양육자였다. 하루아침에 어른이 될 수는 없었지만 이미 팔 년 전, 모의 가출을 했던 날부터 어른이 될 준비를 했기 때문에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당연히 아니었다. 혼자 산다는 것은 단지 식사와 청소와 빨래를 혼자 해결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조차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지만 오랜 시간 합법적으로 가출할 날을 기다려온 나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가장 커 보이는 문제는 생활비를 넉넉하게 확보해서 굶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가장 큰 문제는 안전을 넉넉하게 확보해서 다치거나 죽지 않는 것이었다.


시즌 1의 종료를 일 년 앞두고 아빠와 합가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미숙한 어린 여성으로 혼자 사느라 짊어진 부담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내가 부모의 딸로 성장하는 동안 둘만의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던 아빠와의 시간을 보충하는 경험은 중요했다. 첫 일 년, 그러니까 시즌 1의 마지막 일 년은 흔한 프로이트적 부성 결핍이 남아있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아빠를 닮은 사람을 일부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아빠도 하지 않는 잔소리를 하는 오빠한테 무장해제 된 적도 있다.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죽빵을 날렸겠지만, 자타공인 의남매와 같은 사이라면 그런 대사에 설렐 수 있었다. 아마 오빠를 가져보지 못한 장녀의 약한 고리 때문일 것이다. 그 오빠는 그냥 오빠였다.


남들이 당연히 애인이거나 썸남일 거라고 생각해도 개의치 않고 뒤통수에 뽀뽀를 하는 오빠였다. 나는 무심하지 못한 편이라 싫은 게 아니라면 좋은 거였는데, 이 사람의 마음은 아니란 것을 아는 순간 정신을 차린 것 같다. 다른 친한 썸남이 많기도 했고.


"그 오빠 때문에 양다리 걸치는 기분이야."


썸남 H와 비교적 사이가 좋았던 시기에, 썸남 B가 자꾸 쓰담쓰담해서 친한 동생에게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는 둘 중 그 누구와도 연애를 하지 못했다. 한 사람은 쉬는 시간에만 나를 만났고, 한 사람은 자기가 내 친오빠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귀가는 각자의 집으로 했다. 한 사람은 우리 집에 가자고 했을 때 따라왔고, 한 사람은 택시를 타자마자 자기 집 주소를 부르며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했다. 한 사람은 너무 쉬웠고, 한 사람은 방어막이 물 샐 틈 없었다.




시즌 2는 스물여섯 살에서 서른세 살이라고 하자. 우리는 젊었다. 잘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잘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오빠들이 나를 키웠다. 썸남 H는 나를 어느 정도 떠받들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내가 뱁새 같아서 허세가 많아졌다. 나는 내가 황새가 아닌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그것을 인정하려면 또 한 시즌이 지나야 했다. 아직 나는 나를 키우는데 미숙했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다.


썸남 B는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모두에게 어필하는 모습을 본다. 나는 댄서로 인정받고 싶었고 주관적이라 해도 호평을 하는 사람과 잘 지냈다. 단순했다. 썸남 H는 호평을 했지만 내가 너무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시즌 2는 내가 정말로 잘하는 것을 찾아야 했던 시기였다. 열일곱 살 까지는 거의 모든 것을 애매하게 잘했지만 열여덟 살부터는 거의 모든 것을 애매하게 못했다. 기똥차게 잘 했던 것도 시간의 풍화를 맞았다. 썸남 B는 특유의 신통력으로 내게 공부를 하라고 했다. 이게 그 아빠도 하지 않는 잔소리였다.




아빠는 책상을 사주셨다.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는 게 어때? 혹시 기자가 될 생각은 없어? 없었다. 나는 책상에서 음악을 듣거나, 드라마를 봤다.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췄다. 큰 방을 차지한 두번째 집에서 필요 이상으로 가구를 샀더니 춤출 공간이 없어졌다.


게임을 했다. 프린세스 메이커를 했다. 프린세스 메이커를 할 때, 딸에게 계속 무용 강습을 시키려면 돈이 많아야 했다. 양육자의 수입은 시즌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박봉이었고, 박봉이 아닐 때는 기복이 심했다. 딸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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