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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Sep 20. 2023

연고 없는 지역에서 살아남기(1)

나는 어떻게 전북도민이 되었나

 내 고향은 서울이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모든 교육과정을 서울에서 마쳤다. 군산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서울이 아닌 곳에서 살았던 시간은 호주 10개월과 캄보디아에서의 5개월. 다 끌어모아도 채 반년이 되지 않는데, 더구나 국내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전북 군산으로의 이주는 한국이되 서울이 아닌 곳에서 거주하는 첫 경험이었다. 내 나이 서른여섯에.


지역을 선택한 기준 - 결국은 직장   


 탈서울을 결심하고 가장 처음 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잘 살 수 있는 지역을 고르는 것이었다. 


 나는 도시이면서도, 너무 번잡하지 않은 도시에서 살고 싶었다. 광역시를 제외했다. 한반도의 동쪽도 제외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남도 강진, 어머니의 고향은 전라남도 남원이라 어릴 적부터 호남 지역을 자주 오갔다. 호남 지역에 거주하는 친척들도 몇 있다. 정말 위급할 때 나의 작은 버팀목이 되어줄, 마음의 안식처랄까. 반면 영남 지방을 방문한 경험은 성인이 된 이후 몇 차례의 여행이 전부였다. 지역감정은 없었지만(정말?), 낯섦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하고 싶다. 


 다음은 일자리. 농업과 어업이 아닌 사무직이 필요했다.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농촌과 어촌에서 각각 3개월 정도 일한 적이 있다. 그때 알았다. 아, 나는 이 이상은 못하겠다. 필드가 아니라 농·어촌의 공장에서 일한 거였지만, 그마저도 감당이 안 됐다. 20대 초반에도 체력이 달리고 마음이 힘들었는데,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은? 과욕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전북, 전남, 그리고 충청권역까지 바운더리를 좁히고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접근성이 가장 좋은 일자리는 역시 공공 부문이었다. 나라일터(www.gojobs.go.kr)와 잡알리오(job.alio.go.kr)를 하루에도 몇 번씩 접속하며 기존 경력을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는 언론홍보 분야의 일자리를 중심으로 살폈다. 


 난데없이 서류전형이 내 발목을 잡았다. 프리랜서 경력이 대부분이라 경력증명서를 받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여전히 프리랜서는 경력증명을 발급해주지 않는 곳이 많은 탓이다. 여차저차 경력증명서라는 난관을 넘어서니 다음으로 업무수행계획서라는 장벽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어떤 업무를 수행할지 정보가 거의 없는데 계획서를 내라니. 그것도 A4용지로 3~5장(대신 글자 크기가 15pt였다)나 되는 분량을! 처음 보는 서류 양식과 낯을 가리느라 몇 곳을 그냥 포기해야 했다. 운이 좋게도 본격적으로 서류를 접수한 지 두 달 만에 최종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전문임기제 다급, 6급 상당의 자리였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탈서울 거주지는 결국 직장에 따라 결정됐다. 하지만 최소한의 영역을 정해놓는 일은 반드시 사전에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 말과 음식까지 완전히 낯선 지역에서, 주변에 최소한의 기댈 곳조차 없이 산다는 건 너무나도 어려우니 말이다. 적어도 해당 지역내가 좋아하는 특성 하나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초반의 며칠, 그리고 몇 달을 견딜 수 있다.

금강하구둑에서 본 저녁노을. 군산의 석양은 거의 매일 아름다웠다.


지역을 정하고, 직장 찾기


 탈서울 후 두 번째 이주는 달랐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그 직군의 문화가 나와 철천지 원수지간이 될 만큼 맞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일단 회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직 준비는 백수인 상태로 시작했다. 다음 거주지를 이미 마음속에 정해둔 상태로.


 처음 탈서울을 결심했을 때는 소도시를 원했다. 그 기준에서 군산이라는 도시는 나쁘지 않았다. 25만의 인구와 두 개의 대형 마트와 대형 쇼핑몰, 로컬푸드마켓,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고, 은파공원이라는 괜찮은 산책로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통하는 로컬 커뮤니티나 대안공동체, 혹은 동호회를 찾기 어려웠다. 


 마이너한 취향의 나와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인구가 필요하다는 걸, 군산에 거주한 지 1년 반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군산을 떠나기로 결심했지만, 이상하게 전북에는 계속 살고 싶었다. 결국 전주였다. 결정적으로 전주에는 내가 마음을 흔드는 커뮤니티가 있었다. 군산에 살면서도 방문하고 싶어서 계속 눈팅을 했던, 친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로컬 커뮤니티가. 


 그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싶어서 전주지역 기업의 채용공고를 눈이 빠져라 찾아다녔다. 안타깝게도 공공부문과 각종 전문직(간호사, 요양보호사, 치위생사, 선생님 등등...), 생산직을 제외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구직사이트 몇 곳을 뒤져도 서류를 넣을 만한 곳이 없었다. 괜찮아 보이는 회사 몇 곳에 지원을 해도 내 기존 경력과 맞지 않아 1차에서부터 광탈하기 일쑤였다. 


 백수 생활이 길어지고, 군산 집의 전세 만기일이 다가오면서 불안감이 커졌다. 서울로의 복귀를 고민했다. 서울에 있는 일자리도 알아보고, 면접도 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결국 전주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전주에 거주지를 얻었다. 야호!


 연고 없는 지역에서 살아남기 = 직업 구하기


 전세 만기 한 달 전까지 최종합격 연락을 받지 못했을 때, 나는 잠깐 생각했다. 일단 집을 빼서 전주로 이사를 가자! 가서 일자리를 찾자! 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러다 결국 고향이자 가족이 있는 서울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결국 일자리다. 직업이다. 학업이 아니라면, 성인이, 그것도 혼자연고 없는 지역에 내려올 수 있는 계기는 거의 없다. 결국 일자리다. 문제는 앞서 말했든 지역에서 일자리 찾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취업남방한계선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취준생들이 수도권 특정 지역 남쪽으로는 가고 싶지 않아 한다는 의미지만, 조금 비틀어보면 수도권 특정 지역 남쪽으로는 괜찮은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탈서울을 결심했다면, 특히 취업 남방한계선 이남으로 내려올 계획을 세웠다면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서울에서 만든 경력은, 월급은 잠시 잊어야 한다.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결심을 해야 한다. 과거의 모 대통령이 했던 망언, "청년들이 눈을 낮춰야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만 같아 이렇게 적으면서도 내심 불편하지만, 이것이 내가 겪은 현실이다. 반전이 있다면, 비록 월급은 줄었지만 생활의 질은 오히려 나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탈서울을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오시라. 사무직도 탈서울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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