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 - 프롤로그 중에서
여행의 시작과 끝
여행의 시작은 언제일까? 흔히들 비행기 표를 끊는 순간부터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행의 끝은 언제일까? 돌아오는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일까? 모국어가 들려오고 익숙한 음식의 냄새가 코끝에 밀려올 때, 밀린 빨랫감과 출근해야 하는 일상이 코앞에 닥쳤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여행이 끝났음을 실감한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지나면 우리는 언제 여행자였냐는 듯 또 완벽히 일상인이 되어 그 일상을 살아간다. 다음 여행지를 물색하면서.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찰나의 여행만을 바라보며 지겨운 일상을 버티는 삶.
2008년 겨울,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기약 없는 긴 여행길에 올랐다. 지금보다 퇴사나 장기 여행이 흔치 않던 시절. 주변 친구들은 모든 것을 중지하고 떠나는 내게 용감하다고 했다. 하지만 떠나 보니 어려운 건 일상을 ‘떠나는 일’이 아니었다. 긴 여행이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변한 것 하나 없이 그 자리 그대로인 잠시 미뤄두었던 일상과 마주했을 때, 이 일상에 다시 기름칠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늘 궁금했다. 길 위에서 만났던 행복한 표정의 여행자들은 돌아간 일상에서 여전히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여행 전과 비슷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어떤 이들은 여행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확신하기도 한다. “여행 후에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여행을 하니 영어도 확 늘고 인생의 짝도 만났어요!”. 나는 아니었다. 여행 후에 가장 달라진 게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어어.. 글쎄 뭐지? 모아둔 돈이 다 사라진 것?” 이상으로 구체적인 답을 할만한 것이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그 경험을 글이나 말로써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행의 경험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당장 나조차도 명확하게 알 수 없었으니까. 그 무렵 쏟아져 나오던 많은 여행책들은 ‘일상을 멈추고 떠날 자유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무도 ‘여행 후 돌아온 삶’ 같은 것에 대해서는 얘기해 주지 않았다. 모아둔 돈도 쌓아둔 경력도 단절된 채 불안한 미래를 마주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는 필요했는데 말이다.
여행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여행을 왜 하는 걸까? 여행을 어떻게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할 것인가? 이것은 오랜 나의 화두였다. 지난 20년간 짧고 긴 여행들을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으니까. 1년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에서 다시 일상을 살아가며 이것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 나가야 했다. 만족스러운 삶은 ‘여행 중’에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여행의 경험을 가지고 돌아온 내가 ‘여행 후’에 일상에서 만드는 것이었다. 여행자로서 경험한 태도들이 일상에서도 지속 가능한지 하루하루 삶으로 기록해 나갔다. 여행의 태도를 일상에 새기는 일. 나는 그것이 글이나 말로 기록하는 것보다 좋았다. 기록보다 삶이 우선이었던 시간들이 하루하루 쌓여갔고 나는 일상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태국의 산골 마을과 닮은 곳을 찾아 이사를 했고, 여행이 가르쳐준 취미들을 돌아온 일상에서도 계속해 나갔으며, 베를린 마켓에 나가 생활비를 벌던 그 무모함으로 돌아온 일상에서도 무모한 짓을 계속해 나갔다. 직업을 바꾸었으며 바뀐 직업이 가져다준 충분한 시간들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서 쏟아지던 별을 보며 위로받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일상에서도 지친 나를 자연 앞으로 데려가 매일 위로해 주었다.
한국에 돌아와 산 지 십 년째. 여행 전과 후에 가장 달라진 게 뭐예요? 묻는다면, 이제는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그것은 나의 일상이라고. 긴 여행을 떠나보기 전에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땅에 우연히 태어난 죄로 나는 왜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 하며 일상의 모든 것들이 불만 투성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살아보고 싶었던 수많은 나라와 도시들에 머물러 본 내가 스스로 선택한 도시 ‘서울’에 살고 있다. 예전과 같은 도시에 살고 있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태도로 살아가고 있다.
일상을 여행처럼, 그게 정말 가능할까?
곁에 두고 늘 꺼내 보는 책 중에 ‘담론’이 있다. 이 책에서는 학문 탐구의 과정을 여행에 비유한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 진정한 배움은 지식을 머리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행의 경험이 단순히 소비되지 않고 의미 있는 경험이 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여행의 순간들을 글이나 사진 속에만 박제해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으로 끊임없이 소환시켜 삶을 변화시키는 것. 여행의 경험과 태도를 자신의 일상에 촘촘히 쌓아 올리는 것. 내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여행의 목적이다. 아무리 멀리 긴 여행을 다녀왔어도 돌아온 일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배경이 다른 장소에서 먹고 자고 소비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불만족스러운 일상에서 출발해 만족스러운 일상에 도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을 여행처럼? 말이 쉽지, 그게 말처럼 될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이 책에 실린 나의 작은 경험들이 증거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여행책에 거부감이 컸던 내가 굳이 여행 이야기를 책으로 만든 이유는 이 공개적인 기록물을 증거 삼아 나 또한 계속해서 원하는 일상으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으로 말하고 싶다. 만족스러운 일상에 도착하기까지, 우리의 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여행과 일상의 괴리 속에서 오늘도 혼란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1년의 여행’이 그 후 돌아온 ‘10년간의 일상’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삶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여행의 기록’과 ‘일상의 기록’이 같은 테마로 교차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