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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술집 주인

by 구작 Mar 04. 2025

아파트 한 단지 덜렁 있는 작은 마을에 세상에서 제일 불친절한 술집이 하나 있었으니

문은 밤 10시에 열고 메뉴판도 없다

주인장이 주는대로 먹는 시스템인데 문제는 주인도 없다

아니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ㄷ자로 생긴 빠에 손님들이 앉고 ㄷ자 안쪽이 주방이다

ㄷ자 빠에는 천장까지 칸막이가 둘러쳐 있고 자리 앞에 작은 미닫이 창이 있어 주인장은 그 창으로 안주를 내놓는다

손님들은 창이 열릴 때마다 주인장을 보기 위해 고개를 빼지만 늘 실패한다

요리를 내는 손에는 오븐장갑이 껴있는데 다이어트병원 캐릭터일 것 같은 뚱뚱한 형상이며 큰 입으로 접시를 물었다 놓는다

비밀스런 주인의 행태로 손님들은 쉽게 단골이 된다

물론 안주도 맛있다

제철 재료로 내는 안주들은 한식과 일식을 망라하며 술시부터 고픈 배를 움켜쥐고 들어서는 손님들에게 훌륭한 만찬이 된다

그래도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의 비밀이다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손님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주인의 모습은 천차만별이며 대체로 미화됐다

누구는 배불뚝이 장갑 밑으로 하얗고 얇은 손목을 봤다하고

누구는 벽 너머에서 들린 재채기 소리는 필시 30대 비출산 여성의 것이라 우겼다

더러는 혼자서 많은 메뉴를 조리하려면 나이 지긋한 남자일 거라 추측했고

어떤 집요한 이는 사업자를 확인해보니 남자이름이라며 더 이상 주방 안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에서 안주 창을 걸어 잠가 일체 주방을 공개하지 않는 주인의 꼼꼼함을 누구도 뚫지 못했다

장보고 오는 주인을 낮부터 기다리다가 허탕치기 일쑤였고

가게 불이 꺼질 때까지 길 건너에서 숨어있던 취객은 잠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잠들기도 했다

주인은 주방 안에서 잠도 자고 장도 보고 명절도 보내는 것 같으나 누구도 확인할 수 없었다

주인만큼 술집은 신비한 곳이었다


묘하고 비밀스런 분위기가 몇달 이어지니 다들 호기심을 잃었다

말은 안 했지만 모두가 상상의 맛이 실제보다 더 맛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늘 친구랑 오는 두 젊은이는 항상 이모라고 불렀고

근처에서 옷가게를 하는 김사장은 언니라고 불렀으며

저녁마다 식사 겸 술을 먹는 아저씨는 미쓰홍이라고 불렀다

왜 홍이냐고 묻자 자기 첫사랑이 홍씨였다고 답했다

손님들은 그렇게 암묵적으로 자기가 부르고 싶은대로 주인을 찾았다

갈수록 술집에는 혼자 오는 손님들이 많아졌다

여럿이 시끄럽게 먹을 자리도 아니었지만

시끄럽다 싶으면 주인은 창을 열고 계산서를 던졌다. 그만 나가라는 뜻이었다

주방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 애인하고 싸운 얘기, 정신 못 차리는 남편 욕도 많이 했다

당연히 주인은 답하지 않았지만 시키지 않은 안주나 술을 서비스로 주면서 공감을 표했다

한번은 어떤 젊은 여자가 사는 게 힘들다고 하소연을 한참 했었다

옆에 앉은 손님들은 말 없이 들어주면서 그 여자를 위로했다

안주 창이 열리더니 그 여자 앞에 책에서 찢은 종이 한 장이 내졌다

여자는 그걸 보고 울었고 다른 손님들도 돌려 읽었다


강물이 우는 방법 / 서덕준


네가 우는 것은 내게 어떤 폭풍우보다도 소란한 일.


잔잔한 강마저 수많은 모랫돌에  물결이 찢기고 아무는데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찢기고 다시 아물까


너의 울음을 멎게 할 순 없지만 우리 같이 흐르자.

머지 않았어

저기 앞이 바로 바다야.


울지 마, 곧 바다야.


그때쯤이였을 게다

손님들은 더 이상 주인장에게 얼굴 좀 보이라고 청하지 않았다

단골들은 새 손님이 와서 주인을 궁금해 할 때마다 저지했다

"신이라 생각하셔. 우리를 위로해주는 신."

날이 갈수록 그집 술은 달았다


어느날 술집에 길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빛을 삼키는 검은 생머리에 핏기가 보이지 않는 하얀 얼굴이었고 주름은 없었지만 젊은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가만 가게를 둘러보더니 눈 앞에 굳게 닫힌 안주 창을 바라봤다

메뉴판도 주인도 없는 걸 알아채고 당황한 듯 했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쓰고 창을 두 번 노크했다

낯선 노크에 주인도 당황했는지 몇 초 후 창이 열렸다

여자는 종이를 내밀었고 주인은 뚱뚱한 장갑으로 가져갔다

잠시 후 소주 한 병과 땅콩이 나왔다

누군가 땅콩도 있었냐고 옆자리에 물었는데 답이 없었다

여자는 검은 착장만큼 고요하게 술을 마셨다

낯선 이의 등장에 모두가 조용했고 여자가 땅콩을 씹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톡톡 부러지고 갈리는 소리에 다들 땅콩이 맛있어 보인다고 느꼈는지 주인에게 땅콩을 시켰다

하지만 돌아온 건 조미김이었다. 땅콩이 없다는 소리다

손님들은 아쉬워 했지만 익숙한 대응이었기에 이내 하던대로 술을 마셨다

여자는 반 병쯤 마시고 남은 병과 땅콩 접시와 카드를 주방으로 밀어넣은 채 일어섰다

많이 해본 것처럼 능숙한 일련의 행동에 손님들은 그녀가 문 밖에 나갈 때까지 눈으로 좇았다

그때 주방에서 얕은 한숨소리가 났다


검은 여자는 며칠 후 또 방문했다

그날도 소주와 땅콩을 시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지랖 넓은 아저씨가 말을 걸어봤지만 여자는 술잔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여자는 그날도 비디오테이프를 돌리는 것처럼 전과 똑같이 자리를 정리하고 나갔다

남은 손님들이 눈을 마주치더니 상상의 장이 열렸다

이 동네 사람이 아니잖아?

티비에 나오는 배우 같지 않아요?

누구?

딱 짚어 누구라고 하긴 어렵지만 본 거 같은데

남자친구 기다리는 거겠지

이 밤에? 술집여자인가?

주방에서 칼질 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컸기에 모두 반사적으로 말을 멈췄다

안쪽에서 술을 못이겨 엎드려 있던 남자가 정적을 깼다

"왜 나만 땅콩 서비스 안 줘요?"


장맛비가 땅을 울릴 정도로 오던 날이었다

시커먼 밤을 술집 간판만이 밝혔다

너무 비가 많이 와 단골들의 발걸음도 멈췄다

그런 날 검은 여자가 자정이 다되갈 무렵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었지만 여자는 종이에 주문을 써서 노크를 하곤 밀어넣었다

안주 창이 열리고 소주와 땅콩이 나왔다

잠시 후 주방에서 칼질 소리가 났다 

당근과 무, 감자가 썰렸다

여자가 술 따르는 소리가 텅빈 술집을 채웠다

주인은 돼지고기를 썰었다

여자가 땅콩을 하나 입에 넣었다

주인은 버너에 팬을 올리고 참기름을 두른 후 고기를 볶았다

여자의 잔이 비었는데 채워지지 않고 있다

기름에 지글지글 볶아진 고기 냄새가 닫힌 창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여자가 술을 따랐다

주인은 팬에 물을 붓고 화력을 높였다

여자가 술잔을 비웠다. 땅콩은 먹지 않았다

10여분 술집은 작은 진동 하나 일지 않았다

부글부글 물 끓는 소리만 났다

여자가 다시 술잔을 비우자 주인이 움직였다

팬에 된장을 넣고 주걱으로 휘휘 저었다

여자가 빈 잔의 테두리를 검지로 천천히 쓸었다

주인이 불을 줄이고 소금과 후추를 넣어 간을 봤다

여자가 술잔을 채웠다

여자는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맛봤다

소주 한 잔을 가득 따라 천천히 끝까지 마셨다

돼지고기에 무를 얹어 입안에 넣는다

땅콩 먹을 때보다 조심스럽다

주방은 먼지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는 고기에 당근을, 고기에 감자를 차례로 얹어 먹었다

연거푸 숟가락질이 이어지자 그제야 주인은 도마와 칼을 정리했다

여자는 돈지루와 술을 다 비웠다

마지막 한 모금의 술이 힘겹게 식도를 넘어갔다

여자는 한 번 숨을 고르고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접시 옆에 뒀다


똑똑

"고맙워요. 내 생일마다 이걸 해줬죠. 오늘따라 오는 길이 쌀쌀했는데 가는 길은 따뜻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행복하시구요."


여자가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주방은 침묵했다

문이 닫히자 안주 창의 문이 열리고 여자가 비운 접시와 술잔이 들어갔다

여자가 남기고 간 문틈으로 장대비의 한기가 가게로 들어왔다

바람이 문틀을 갈퀴는 소리인지 주방에서 난 소리인지 얇고 긴 소리가 한 동안 가게를 맴돌다 사라졌다


며칠 후 가게 문에 안내문이 걸렸다

"뚱땡이 오븐장갑을 잃어 버렸습니다.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녀오겠습니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남자 두 명이 돌아서며 말한다.

장갑이 있어도 안에 있겠지 왜 찾으러 나간다는 거야?

장갑에 발이라도 달렸나보지. 저 육회집으로 가자

남자들이 총총총 사라지자 

안에서 문이 열리고 바퀴가 달린 캐리어를 든 검은 사람이 미끄러지듯 지잉지잉 지면을 핥으며 서쪽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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