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에서 내려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꽤 그럴싸해 보이는 고층 호텔. 깊은 밤, 길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출발 전, 자정을 넘겨 체크인을 하게 될 거라고 리셉션에 연락을 해두었다. 택시에서 내린 곳이 호텔 앞 버스 정류장. 길 건너편에는 주상복합쇼핑몰이 보였다. 오면서 검색해 보니 도보 거리에 규모가 큰 근린공원과 도서관, 영화관 등이 있었다. 내일 조식을 먹고 들러야겠군. 거리와 가격만 보고 급하게 골랐는데 이토록 입지 좋은 곳이라니. 억수로 운이 좋은 날인가?
츄리닝에 후드 점퍼. 맨 얼굴에 노트북 가방을 둘러 매고 자정이 넘어 나타난 여자를 리셉션 직원은 어떻게 보려나. 그러거나 말거나. 근처에 유흥가가 없는 신도시의 가성비 좋은 호텔. 왠지 엄마들의 즐겨 찾기 장소로 이용될 것 같다. 남편이나 아이들과 싸우고 홧김에 나오는 주부가 있지 않으려나. 아니면 부모와 함께 사는데 다투고 나온 올드미스라든가. 아님 말고.
객실로 들어왔다. 깔끔한 내부와 정면이 탁 트인 뷰. 조명을 낮추고 노트북을 꺼내 택시의 라디오에서 흐르던 노래를 검색했다. 제목을 몰라 가사의 한 구절을 입력했다.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났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훈희의 ‘꽃밭에서’였다. 선 상태로 가사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를 들으며 몸을 가볍게 흐느적거렸다. 가만히 노래를 따라 불러 보았다.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평소 케이블선과 노트북을 넣어두는 가방을 집어 들고 순식간에 집을 빠져나왔다. 그 외 책 두 권과 작은 로션 하나. 아파트 내 정자에 앉아 근처 호텔을 검색했다. 주말 밤이라 대부분이 만실이었고 터무니없이 비싼 객실만 남아 있었다. 먼 지역까지 가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차로 20분 거리의 옆 동네 신도시인 D시가 괜찮아 보였다. 남편에게 숙소 예약 정보를 보내고 택시를 불렀다. 아직 둘째 녀석과 같이 잠을 자는 나는 도저히 오늘 밤은 아들과 한 방에서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상황을 다 본 남편은 그러라고 하면서 말 줄임표를 보내왔다. 그 와중에 자기도 호캉스 가고 싶다고 부러운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호캉스?
큰 아들의 사춘기를 겪으면서 심장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듯한 날이 많았다. 그래도 외박을 한 적은 없었다. 원, 투, 쓰리… 일레븐… 열두 살 작은 아들은 숫자에 대한 총 20개의 영 단어를 따라 쓰라는 내 말에 너무 많다며 쓰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친구들보다 한참 늦은 5학년 말에 영수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도 온몸으로 학원을 거부했던 큰 아들의 경험이 있기에, 나는 어떻게든 작은 아이는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학원 보내는 것을 강요하지 않으려 했다. 대신 집에서 최소한의 학습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또래 친구들이 학원에 가서 한 번에 두 세 시간씩 있다 오는데 반해, 아들은 집에서 한 시간 공부하는 것도 겨우 겨우 이어나갔다. 이번 정부 들어서 중학교 1학년의 내신 평가가 추가되어 초등학교 학부모들의 발등에 불이 붙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외면하고자 했지만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아들은 단 한 자도 쓰지 않고 버텼고, 나는 당장 공책을 펴고 단어를 쓰라고 재촉했다. 글자는 써야 익혀진다며, 두 번씩 쓰라는 것도 아니고, 총 학습 시간이 1시간이 넘어가면 그만해도 된다고 타일렀다. 그러나 아들은 연필을 들지 않았다. 어르고, 설득하고, 혼내다 결국 나는 매를 가져오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한 순간이었다. 단 한순간에 나는 마음이 끔찍해져 버렸다. 규칙적인 일상생활, 그리고 안전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그 어떤 말도 먹히지 않는 큰 아들을 보면서 불안과 좌절이 이어지던 날들. 그 순간 작은 아들의 모습에 큰 아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질려버렸다. 나는 이성을 잃고 아이의 등짝을 마구 때리기, 아니 갈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하지 마!”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내 팔을 잡고 자기 몸으로 나를 제압하려고 했다. 5학년이지만 아직 또래보다 작기에 제압은 가당치도 않았지만 옥신각신하는 사이 방에서 남편이 뛰어나와 아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가방을 챙겼다. 나의 행동도, 아들의 행동도 충격이었다.
가뜩이나 학구열이 과한 지역. 학원이나 과외를 하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공부해야 하는데, 아들은 왜 그 정도도 따라주지 않을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다가 학습에서 도태되면 중학교에 들어가 방황으로 이어지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는 것을 큰 아이의 경우를 통해 보지 않았나. 가능한 내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식이 아니라 스스로 학습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역시나 부모가 가르치는 것이 무리였나.
왜 우리 아이들은 온몸으로 공부를 거부할까. 부모가 대단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왜 그토록 유별날까. 정말 시골로 이사를 갔어야 했나. 아니면 어렸을 때 단호하게 잡았어야 했나. 이것저것 죄다 잘못했던 걸까. 혹은 그냥 과외로 바꿔버리면 깔끔하게 정리될 일인가. 아니, 그렇지 않음을 큰 아이의 경우를 통해 경험했었다. 이런 식으로는 일반 중학교에서는 힘들 텐데, 또다시 대안 학교를 알아봐야 하나. 아직 큰 녀석도 한참인 상황. 지금 이 시간, 아들도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만 나는 또다시 모든 것에 대한 정나미가 뚝 떨어져 버렸다. 모두 다 놔 버리면 내 속이 편할까. 아이들이 알아서 클까. 나는 의연해질 수 있을까. 나아갈 수 있을까. 그래야 하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눈물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음을 추스르고 그 시간을 잘 보내려 했지만 큰 아들이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꼬박 밤을 새우고 말았다. ‘브런치가 무료인데… 숙박비에 포함인데…’ 다음 날 아침, 어느덧 체크아웃 시간이 다 되었지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커튼이 쳐진 객실은 한밤처럼 깜깜했다. 피로로 눈가가 욱신거리고 두들겨 맞은 듯 온몸이 쑤셔 눈을 뜰 수 없는 와중에도 공짜 아침 식사를 놓치긴 아깝다는 생각이 꿈결처럼 떠오르다 사라졌다.
대강 아침을 챙겨 먹고 호텔에서 나왔다. 비척비척 걸으며 공원과 맞붙은 시립 도서관에 들어갔다. 넓은 도서관은 사람들로 꽉 차 앉을 자리가 없었다. 학생들은 문제집을, 어른들은 책을 읽거나 역시나 각종 시험을 위한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다들 참 성실하게 사는구나. 여전히 낯선 평범한 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시선을 거뒀다.
나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으며 꾸벅꾸벅 졸고, 그러다 일어나 이 글을 쓰고, 허기를 느껴 밥을 사 먹고,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밤이 되었고,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광역버스를 기다리는데 내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기능에 충실한 검은색 트레킹화. 올봄의 아이슬란드 여행 내내, 그리고 이후에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존재였다. 불현듯, 아이슬란드에서의 20여 일 후 혼자 먹고 자는 것이 익숙해졌다는 자각이 들었다. 사실 홧김에 튀어나온 거였지만 이 1박 2일이 나쁘지 않았다. 빌어먹을 아들만 집에 잘 들어왔더라면 제대로 기분 전환을 하고 들어갈 수도 있었다.
반전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고, 역시나 남자 셋의 반응은 일상적이었다. 엄마가 집 앞 마트에 다녀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작은 아들만 엄마가 밤새 어디에서 자고 온 건지 궁금해했다. 남편은 주방에서 별 것도 아닌 설거지를 과장된 동작으로 하고 있었다. 냄비 뚜껑을 열어 보니 이제 막 먹고 치웠다는 닭볶음탕에는 야무지게 감자와 당근도 들어있었다. "사과는 왜 넣은 거야?" "냉장고에 굴러다니길래 넣어 봤어." "잘했네." 한 마디만 했다. 평소 식사 시간에 자신들의 수저도 놓지 않는 남자 셋에게 나의 20여 일간의 여행은 경험이자 훈련이 되었다.
나만 없는 나의 집. 나는 종종 그것을 꿈꿨다. 대단한 사건 사고나 아닌 그날의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나는 지지고 볶는 일상이 기약 없이 계속될 것이며, 그때마다 나는 내 살 궁리를 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호캉스. 다음에 다시 가 보려고 한다. 제대로 날 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번씩 슥슥. 드문드문, 슥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