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 메시지를 보냈다. 아침에 얘기해 뒀지만, 잊어버리고 평소처럼 친구들과 어디론가 가버릴까 조바심이 났다. 엄마의 점잖은 말투 속에 꼭 참석하라는 의중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몇 번이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답장은 없었다.
"둘이 나갔다 오면 집에 와서 애들 밥을 또 차려야 하잖아?" 부부의 날이지만 나는 넷의 외식을 선택했다. 오늘만큼은 저녁을 차리지 않겠다는 나의 고집이었다. "그렇긴 하지." 남편도 별 말이 없었다. 멀지 않으면서 분위기가 괜찮아 보이는 멕시칸 레스토랑. 넷의 취향을 반영한다고 했지만 나는 큰 아들을 신경 쓰고 있었다. 손주에 대한 짝사랑으로 애가 타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식사 자리에도 겨우 얼굴만 내밀고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밥만 먹고 사라지곤 하는 녀석이었다. 우리 넷의 마지막 외식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했다. 음식으로라도 아들을 붙들어 놓고 싶었다. 날이 날이지 않냐며, 그렇게 엎드려 절 받기라도.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따뜻한 레스토랑. 예쁘게 차려진 음식. 금요일 밤의 여유로움 속에 우리 가족도 제법 어울려 보였다. 언제나처럼 별다른 대화 없는 아들 둘 집의 식사시간이었지만 그 풍경 속에 우리 넷도 괜찮아 보였다. 그랬으리라. 평범한 가정의 일상적인 모습. 함께하는 시간. 체념한 척했지만 실은 늘 바래온 시간. 비록 잠시라도.
집으로 돌아오며 우리는 말없이 차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만족스럽게 먹고 몸과 마음이 나른해진 후였다. 어둡고 고요한 거리를 지나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다. 대형 트리와 트리를 가득 채운 수많은 전구에 눈이 부셨다. 큰 교회 앞이었다.
"벌써 크리스마스라니. 진짜 시간 빠르다. 올해 시간이 정말 빨리 갔어." 옆자라에 앉은 아들이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맨날 자서 그런 건 아니고?" 아들은 평일에도 오후 늦게까지 자기 일쑤였다. 아차. 나는 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 좋았는데 괜한 소리를. 또 얼마나 뾰족하게 대꾸하려나.
"뭐 그렇기도 하고..." 누그러진 반응이었다. 의외였다.
"올해 정말 재미있었어."
"최고로 좋았어."
"축구가 정말 재미있었어. 진짜 매일 축구를 했어."
아들의 갑작스러운 말에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당황했고, 이내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들이 툭 던진 말은 마치 고백처럼 들렸다. 아들에게서 '재미있다'라는 말을 들어 본 게 언제였던가. 초등학교 때였나? 중1 때였나? 학업에 뜻이 없는 아들에게 학교가 얼마나 지겹고 힘든 공간일까 싶었다. 교실에 앉아 있는 게 얼마나 고역일까 싶었다. 그럼에도 제발 학교에 갔으면, 앉아라도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그 또한 폭력이라는 걸 알면서 자더라도 학교에 가서 자라고 얼마나 애원했던가. 학교를 째면 언제나처럼 아이에 대한 원망과 화로 마음이 엉망이 되고, 학교에 가면 현관문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얼마나 안쓰러웠던가. 그렇게 아이가 학교에 가는 날도, 가지 않는 날도 언제나 어떤 이유에서든 마음이 무거웠다. 그 상황에서 축구가 유일한 축미인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그 의미가 그렇게 컸을 줄이야. 그랬을 줄이야. 아들은 친구들이 학원에서 돌아오는 밤 열시면 축구 가방을 메고 나가 자정이 넘어 들어오곤 했다.
"그랬구나... 아들이 좋다고 하니까 엄마도 좋네. 너무 좋네..."
나는 차 안의 어둠 속에서 용기를 내어 아들의 손 등에 내 손을 살포시 얹어 보았다. 아들이 가만히 있었다. 내 손을 내치지 않았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코로나가 터진 초등학교 6학년에 전학을 오고, 친구를 사귀지 못한 채 중학교에 진학하고, 중3 때 다시 전학을 나오고,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의 수많은 일들. 지난 몇 년간의 내 마음의 설움이 모두 씻긴 듯했다. 내 아이가 좋다고 한다. 좋다고 한다... 아들, 행복하길 바래. 차장을 바라보는데 계속 눈물이 흘렀다. 어쩌면 난생처음 흘려보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덧.
며칠 후, 아들은 또다시 내 억장을 무너뜨렸고, 다음 날 주일 예배에 나간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눈이 팅팅 부었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오, 아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