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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개미 Jan 22. 2024

노란 튤립 한 송이와 쪼꼬레우유

노란 튤립 한 송이가 책상 위에 놓여있다

밤에 내 방은 비로소 아늑해진다. 노란 튤립 한송이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책상 오른쪽엔 내 산문집 두 권이 놓여있다. 책상 왼쪽에는 치즈 한 장과 와인 한잔, 읽다 만 책 두세 권, 가운데엔 노트북과 모래시계와 항아리 향초가 놓여있다.  

- 고요한 포옹 中에서



아늑한 자기만의 방에 돌아온 저자가 자신의 책상을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며 내 앞에 놓인 아이스초코를 쳐다본다. 깨지지 않는 유리컵, 아니 내가 떨어뜨리지 않는 한 깨지지 않을 투명 유리컵에 맑은 갈색의 옷을 입은 초콜릿우유가 담겨있다. 얼음 위로 쌓아 올린 벨벳거품과 컵의 원형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카카오파우더가 조화를 이룬지라 쉽사리 마시지 못한 채 책을 읽는 중이다. 다른 것보다 노란 튤립 한송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머물렀다.

‘어디에 담겨 있을까, 유리병일까 플라스틱일까, 생화일까 조화일까, 피어났을까 아직 활짝 피지 않은 몽우리의 수줍음을 간직한 한 송이일까’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 상상 속 저자의 노란 튤립은 투명한 유리병에 담겨있다, 내 앞에 있는 아이스초코처럼. 그래서인지 주문 후 마시지 않고 있던 음료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음료를 한입 먹어본다. 크림과 함께 먹으려 제공된 스푼을 쉬이 컵에 넣지 않는다. 크림을 떠먹거나 섞어먹는 건 이 초콜릿우유를 온전히 대하는 마음이 아니다.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배우 하지원이 카푸치노를 마시는 장면이 떠올랐다. 내 입술에도 하트모양으로 크림이 묻어나길 바라보지만, 성격 급한 목축임에 하트 대신 커다란 동그라미가 윗입술에 남았다. 앞에 앉은 남자도 없으니 크림 묻은 모양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부드러운 크림과 적당히 단 아이스초코의 맛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초콜릿우유, 언제부턴가 우리 집에서는 초콜릿이 아닌 ‘쪼꼬레’라는 말을 쓴다.

입안 가득 버터를 바르고 ‘춰커얼ㄹㄹ릳’하고 발음하지 않는다. 입으로 초콜릿이라는 단어를 말할수록 너무나도 딱딱하고 단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이들의 언어를 사랑한다. 완성되지 않은 말,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부모의 입모양을 따라 하며 소리를 ‘후-’하고 내뱉는 행위, 말문이 막 틔인 아이의 말은 무해하고 깨끗하다. 우리 집 쪼꼬레의 시작은 어느 날 TV에서 보았던 아이의 언어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어린아이의 언어는 입 모양을 크게 바꾸거나 힘들이지 않고, 내뱉을 때 받침의 단단함도 없는 단어의 향연이다. 아이의 단어는 부드럽고 말캉말캉하다.


초콜릿은 아빠가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다. 미니초콜릿이 들은 봉지를 사면 족히 몇 달은 먹는다. 입이 심심할 때 ‘쪼꼬레 먹을 사람’ 하고 불러본다. (귀여운 척이 아닌 말의 힘을 뺀 것뿐이다.)

오늘은 논커피류에서 음료를 찾다 초콜릿우유를 발견했다. 보통 카페 메뉴판에는 아이스초코 또는 초코라테라고 쓰여있는데 이 책방에는 초콜릿우유라고 적혀있는 게 귀여웠다. 마치 아이의 시선을 담은 음료처럼 느껴졌다. 카페에서 일했었기에 초콜릿우유가 어떻게 탄생될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음에도 쪼꼬레우유가 먹고 싶어졌다. 차마 쪼꼬레우유라 할 수 없어 입에 힘을 모아 말했다.

“사장님, 초콜릿우유 차갑게 한잔 주세요.”


노란 튤립과 초콜릿우유, 이 두 개의 공통점은 유리라는 것뿐이었다. (물론 저자의 책상에 놓인 노란 튤립이 유리병에 담겨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책상에 노란 튤립 한 송이와 산문집 2권이 놓여 있다’는 말에 내가 놀랐던 건 튤립이 어떤 형태로 놓여있든 다른 물건이 침범하지 않는 공간 즉 책을 읽고 작업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유리는 소중한 무언가를 담는 그릇의 의미가 크다. 거칠게 잡을 수 없고 베일듯한 차가움을 가진 존재, 무엇이든 투명하게 받아들이지만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 존재다. 그래서일까, 깨지고 부서지고 다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무언가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진다.


튤립을 놓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소중한 것을 더 소중히 여기기 위한 저자의 안전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원고를 마무리하고 영화를 보고 밤의 시간을 지나 보낸다 하니 그 자리는 저자의 일터이자 쉼의 자리일 것이다. 저자와 다와다 요코는 자기만의 방을 ‘자궁’으로 표현하는 것에 동의하는데 내 방은 다락방과 가깝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소개한 사진을 보면 내 방에 실망할 때가 많았다. 하나같이 예쁘고 아름답고 귀해 보였기 때문이다.

내 방에는 자기만의 자리가 없는 온갖 물건이 책상 위와 책상 밑, 책장 옆 바닥에 가득하다. 특히 떨어지거나 쓰러져도 괜찮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지난 전시 작품들이 아직 방 안을 채우고 있고, 나는 다른 물건을 옮김으로써 필요한 물건을 찾고 책을 옆으로 밀거나 바닥에 내려놓고 글을 쓰고 다이어리를 펼친다.

이 공간을 채우는 것이 물건이 아닌 나의 생각이 닿을 여백이기를 꿈꾸지만, 내 방은 먼지가 쌓이고 콜로 콜록거리며 숨어있는 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다락방의 모습을 띄고 있다. 튤립 한 송이보다 힘 빼고 부를 수 있는 쪼꼬레우유가 더 잘 어울리는 방이다. 


소중한 무언가를 보관하고 유리가 놓인 신비로운 분위기를 갖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는 거리가 멀다. 치즈와 와인, 향초와도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으니 저자가 느끼는 즐거움을 나는 알 수 없다. 정해진 위치를 통해 안정을 느끼고 싶다가도 매일 같이 뒤집을 수 있는 내 방이 좋다. 글을 쓰기 위해 눈앞에 것을 옆쪽으로 밀고 또 밀어야 하지만 다락방이라 생각하니 마음은 편해졌다.

다음을 기약하는 책들과 지난 시간이 담긴 영수증과 스티커들, 작업하다 남은 자투리 종이가 책상 옆에서 점점 높이 쌓여가는 중이다. 아무렴 좋다. 이 방에서만큼은 힘을 빼고 싶으니까.


손 대기 어려운 공간이 아닌 나의 손길이 닿기를 기다리는 물건이 많은 곳, 멋진 테이블에 앉아 있는 각 잡은 나를 꿈꾸는 게 아니라면 다락방이라 부를 법한 내 방에서 이것저것 뒤적거리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방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일까. 

올해는 방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다. 완성되지 않은 아이의 언어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힘을 뺀 내 공간에서 나를 더 편안히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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