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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개미 Feb 12. 2024

곁을 내어준 단어들

세상에 홀로 선 글자만큼이나 곁을 내어준 단어가 많다. 지하철을 타고 가며 읽은 책 [듣기 좋은 말 하기 싫은 말]에서 저자는 한자어가 결합된 단어를 보며 '단어들이 서로 돕고 사는 것이 꽤 보기가 좋다'라는 말을 했다. 서로 돕는다는 표현을 곱씹으며 책을 내려놓고 지하철을 둘러보았다. 지하+철, 휴대+폰, 출입+문 등 지금 이 순간에도 단어와 단어가 곁을 내어주어 새로운 단어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재밌게 느껴졌다. 

언젠가 사람들과 글쓰기 주제를 나누다 마음 심(心)이 들어간 단어를 모아 글을 쓰고 싶다는 분이 계셨다. 가령 흑심, 변심, 결심과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의 마음이 담긴 단어가 얼마나 많은지 한 글자를 덧붙였을 뿐인데 의미가 달라지고 깊이가 더해지고 단단해지기까지 했다. 


누가 이런 단어들을 만들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나고 사라지는 단어를 생각하다 오래전 보았던 [행복한 사전]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행복한 사전]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전'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대도해라는 사전을 만드는 사전편집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를 시작하며 편집 주간인*은 말한다.


단어의 바다는 끝없이 넓다.

사전은 그 너른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

인간은 사전이라는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해 줄 말을 찾습니다.

그것은 유일한 단어를 발견하는 기적 

(...)


과거의 누군가가 이름을 붙이고 의미가 완성된 단어가 우리 곁에 있다. 우리는 매일 그 단어를 모아 하루를 이어나간다. 타인과 소통함은 물론이고 나의 마음을 표현할 단어를 골라 일기라는 이름으로 엮어낸다. 단어를 많이 매만지고 더해갈수록 삶이 풍성해진다. 영화에서 사전을 만들기 위해 첫 번째로 하는 일은 '단어수집'이다. 쓰이는 말을 모아 새롭게 정의해 나가는 것처럼 오늘 내 삶에 일어난 일, 단어, 생각을 흘려보내지 않고 모아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 어떤 단어를 덧붙일지는 나에게 달렸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단어로 이루어진 삶은 편리하면서 닫혀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어에 갇힌 삶을 벗어나고자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춤을 추었던 게 아닐까, 새로운 단어가 계속 탄생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빨간머리앤에게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바로 '이름 짓기 실력'이다. 앤은 초록지붕집으로 가는 길에 만난 연못(Barry's Pond)을 반짝이는 물결의 호수(the Lake of Shining Waters)로 부른다. 이미 붙여진 이름에도 자신의 시선을 담아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던 앤, 표현하는 것에 감정을 숨기지 않았던 앤이야 말로 곁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단어를 가장 잘 활용한 인물이다. 없던 말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단어의 시작이 될 수도 있고 나만의 사전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시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야 말로 

내게 주어진 오늘에게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이지 않을까.


_

*주간 : 일을 주장하여 맡아서 처리하는 직, 또는 그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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