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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개미 Jan 29. 2024

우산

그림책 l 비 안 맞고 집에 가는 방법

  올해는 이상하게 도서관에 갈 때면 비가 온다. 그래봤자 두 번이 전부이지만 눈보다 비는 반갑지 않다. 오늘은 집에서 나설 때부터 비가 조금씩 내려 다행히도 우산을 들고 나왔다. 도서관 입구에 도착해 우산의 물기를 털어내고 커다란 파란 통에 우산을 꽂았다. 건너편 나무 뒤에 놓인 파란 우산통에는 "잃어버린 우산 찾아가세요."라는 글씨와 함께 열개가 넘는 우산이 꽂혀 있었다. 주인이 놓고 갔거나 어디선가 버려진 우산이 돌고 돌아 이곳에 도착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우산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우산이 이리도 많은 거겠지. 


"저는 10번 우산을 쓰고 싶어요."

예약해 놓은 도서를 빌리며 [우산을 빌려주는 우산가게]가 세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기분, 계절과 내 감정에 따라 우산을 골라 쓸 수 있다면 비 오는 날을 좋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도서관 책마다 붙어있는 청구번호처럼 각자의 이름과 번호를 가진 우산이 가득한 우산가게에서 신중히 우산을 고른 후 기분 좋게 쓰고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해리포터의 마법지팡이처럼 우산이 주인을 선택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비가 내 기분에 따라 우산 색이 변한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길거리의 색깔이 아름답진 않을까, 상상에 상상을 더해 비 오는 날의 우울함을 날려보았다. 


  한동안 창립기념이나 기업행사 때 우산은 빠지지 않는 기념품으로 등장했다. 신발장을 열면 손잡이에 00기념 00회사라고 쓰인 2단 우산을 한 번쯤 보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디자인은 투박한 검정 혹은 체크모양이 주를 이뤘고 떨어지지 않는 상비약처럼 연에 한두 번은 새로운 우산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내가 우산을 사서 쓰고 싶다거나 내게 우산을 선물 받고 싶다는 생각이 했던 적이 없다. 


  내가 특별히 기억하는 첫 우산은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던 것이었다. 일본제품으로 기억하는데 동그란 모양이 아닌 버터처럼 납작한 비스킷 모양의 3단 우산이었다. 흔히 보지 못했던 색감에 놀란 건 물론이고 얼마나 가볍던지 가방에 쏙 넣어 외출하는 게 정말 즐거웠다. 책가방에 넣으면 지퍼가 닫히지 않는 튼튼한 2단 우산과 예쁘게 접기 어려운 뚱뚱한 3단 우산을 거쳐 '내 것'이라고 불릴만한 첫 번째 우산이었다. 우산 들고나가는 게 즐거웠던 때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귀여운 우비나 알록달록한 색감의 장화를 선물 받은 아이들처럼 소나기가 내리겠다는 일기예보에 미소 짓던 나였다. 


  지금의 나는 투명 비닐우산을 즐겨 쓴다. 마음에 드는 우산을 만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우연히 썼던 비닐우산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투명비닐 위로 보이는 하늘과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는 게 즐거웠다. 땅만 보기 바빴던 내가 비가 내리는 풍경에 한걸음 들어간 기분이었다. 애초에 가방에 넣을 수 없는 크기이기에 동그랗게 구부러진 손잡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하며 걷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면 금방 목적지에 닿는 마법이 일어나기도 한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수많은 물건 중에 우산이 없는 건 비를 예상하기 못한 채 비를 맞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전의 나처럼 어디선가 받은 우산으로 문제없이 지내거나 당장 비를 피하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멋없고 투박한 우산을 사다 보면 우산의 매력을 느끼기 쉽지 않다. 

그러나 멋없는 우산 중에 투명비닐우산이 있다면 꼭 다시 써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 투명한 곳을 통해 세상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눈앞에서 툭툭 터지는 빗방울을 보며 조금 뿌옇게 보이는 세상도 아름답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제주에서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날 밤 비가 꽤 많이 왔는데 슬레이트 지붕 위로 투둑투둑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에 집중하며 머물렀던 순간이 지금도 그립다. 그날의 제주를 지금도 나는 빗소리로 만난다. 






  어린이열람실에서 그림책을 고르다 시선을 끄는 책 한 권을 빌렸다. 

[비 안 맞고 집에 가는 방법]

나는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실제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거나,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거나, 손에 든 무언가로 머리만 가리거나, 겉옷을 벗어 머리에 쓰거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나 좀 데릴러와줘"라고 말하는 거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어른의 발상에 스스로 실망해서인지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방법이 더 유쾌하고 재밌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즐겁게 비를 피해 집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에게 비는 피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특히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일수록 비는 물놀이의 시작이 된다. 우비를 입고 고인 빗물 위에서 첨벙첨벙 거리기도 하고, 비를 맞으며 뛰어노는 게 당연한 청소년들도 있는 걸 보면 '비가 온다'라는 표현이 꽤나 긍정적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저자가 어린 시절 겪었던 비 오던 날의 추억으로 시작된 이 그림책은 각자의 '비 오던 어느 날'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물론 나의 비 오던 날의 첫 기억은 즐겁지 않았지만, 앞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그림책 속 주인공의 얼굴을 떠오를 것 같다. 그림책 속 방법을 따라 할 순 없지만(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있음) 나에게 오는 비를 이전보다 즐거이 맞이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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