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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fulness May 04. 2020

망각의 축복, 그리고 영원한 사랑

[영화] 1: 이터널 선샤인  


[영화] 1: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마침내 조엘의 기억이 지워진 날,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또다시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2018년부터 기다려왔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드디어 시청했다. A의 인생 영화였다는 것을 접한 지 꼬박 2년이 넘어서야 접했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지금의 나에게 너무나도 시의적절한 영화였다. 발렌타인데이로 시작되는 영화 초반부, 조엘을 처음 본 날 결혼을 이야기하는 충동적인 클레멘타인의 모습, 그리고 결국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된 조엘과 클렘이 왠지 모를 끌림에 의해 몬톡 해변에서 다시 만나는 모습까지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스로를 조엘에게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그들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져야 할 태도를 배웠다.


또 다시 서로를 마주한 조엘과 클레멘타인



    이 영화를 관통하는 두 가지 주제는, 메리와 하워드가 대화하는 장면 중 메리가 언급했던 구절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망각하기에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마저 잊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불린다. 모든 사람의 기억과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잊혀지게 된다. 좋았던 것들, 그리고 나빴던 것들까지 말이다. 영화 속에서는 망각의 극적인 연출을 위해 '삭제'라는 장치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조엘의 모습이 러닝타임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본성인 '망각'(영화 속 기억 파괴 장치)으로부터 계속해서 도망치며 클렘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조엘의 모습을 통해, 아마도 공드리는 우리에게 '망각의 축복'이 가진 양면적 속성을 부각하고자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의 기억은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옅어져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엘이 보여줬던 기억 속 여정을 돌이켜보면, 메리의 구절과 같이 자신의 실수까지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자신이 클렘에게 저질렀던 실수들을 만회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만난 몬톡 해변에서의 이름 모를 집에서 클렘을 혼자 두고 매몰차게 떠났던 자신을 반성하며 무너지는 집으로 다시 다가가 입을 맞추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결국 망각의 축복을 '자신을 위한 축복'으로 만들 것인지, '독이 든 성배'로 만들 것인지는 나 자신에게 달려있는 셈이다.  


    영화 '코코'에서는 사람의 죽음을 '모든 사람들로부터 잊혀지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망각되는 순간,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해보면, 숨이 붙어있는 삶 속에서도 모든 이들로부터 망각되어 철저히 혼자가 되는 순간, 사회적 죽음을 선고받은 것과도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이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나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망각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아래는 영화에서 가장 큰 먹먹함을 남겨주었던 장면이다.


Joel: "okay."


Clem :  I'm not a concept, Joel. I'm just a fucked-up girl who is looking for my own peace of mind. I'm not perfect.


Joel : I can't think of anything I don't like about you right now.


Clem : But you will. You will think of things. And I'll get bored with you and feel trapped because that's what happens with me.


Joel : Okay.


Clem : Okay.


  서로에 대한 기억이 삭제된 이후, 둘은 삭제된 기억이 녹음된 테이프를 함께 듣게 된다. 테이프에는 그들이 연애를 하면서 겪었던 부정적인 사건, 감정, 생각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대사에 나오는 것처럼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느끼던 지루함과 답답함을 견디지 못 해 끝을 마주하게 되고,  조엘은 하루 아침에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잊은 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버린 클렘에 대한 분노와 원망 속에서 그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기억을 삭제하려 한다. 그리고 기억 삭제 과정에 대한 증거물로 남기는 것이 '테이프'이다. 아마도 테이프를 듣고 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헤어진 진짜 이유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될 것이며, 관계의 재결합에서 한걸음 물러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여기서 조엘은 서로의 테이프를 듣고 난 이후에도 "괜찮다"고 말한다. 서로의 과거를 포용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인지, 앞으로 다가올 그들의 미래를 알면서도 받아들인 '체념'인지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는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의 이유로 서로를 향한 사랑이 언젠가 끝을 맞이했음에도, 그들에게는 다시금 마주하게 된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었을 뿐이다.



    앞선 주제였던 '망각'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표면적 주제였다면, '이터널 선샤인'은 영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면적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제목이 던지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앞서, 메리의 구절에서 등장하는 구절이자 영화의 원제목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를 떠올렸다. 한국어로 번역된 제목인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구절 그 자체로는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쉽사리 유추하기 힘들지만, 영화 속 대사와 원제를 살펴보면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태양빛'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티 없는 마음'은 서로에 대한 기억이 모두 리셋된 발렌타인데이의 마음을 의미할 것이며, 티 없는 마음을 평생 따뜻하게 채워줄 '영원한 태양빛'은 서로를 향한 고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또한 이는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대사를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기억이 삭제되기 전에는, 지루하고 따분하며 늙어가는 기분이 드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클렘, 그리고 끝없이 클렘의 마음을 의심하며 표현해주기만을 바랐던 조엘이었으나, 발렌타인데이에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그들이 기억이 삭제되기 전 서로의 테이프, 즉 헤어질 당시의 속마음을 마주하였음에도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던 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원히 우리에게 따뜻함을 안겨주는 태양빛처럼, 항상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항상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터널 선샤인'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어리석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지 못 했기에, 영원함은 커녕 빛을 내지도 못 한 채 끝이 났다. 우리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기억 삭제 회사 '라쿠나 Inc.'가 그랬던 것처럼 원하는 기억을 지워낼 수 없다. 잊고 싶은 기억이라도 평생 간직한 채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언젠가 나의 기억 속에서 그를 만나게 된다면, 내가 반복했던 실수들과 잘못들을 당당히 마주하고,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설령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을 때 기억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클렘이 그랬던 것처럼 매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한 번 더 마주하게 된다면, 내일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너를 아끼고, 너에게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다. 먼 미래에 잊혀질 기억 속에서도 지금의 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티 없는 마음으로 영원히 같은 자리에서 그를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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