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못생겼다
뉘른베르크에서 온 통영 여자의 50대 청춘 드로잉 에세이 ep.82
by
문 정
Jul 2. 2024
손이 못생겼다
어느 날 돋보기 끼고 손을 한번 쳐다보니
주름이 백만 개쯤 보인다.
내 손이 언제 이렇게 못 생겨졌는가.
손톱 밑에 아침에 깐 바나나가 시커멓게 끼여있고
손가락 주름 사이사이 식초냄새가 난다.
이 손으로 자식을 해 먹여 키운 것도 아니고
한때는 나도 손 예쁘다 소리도 들었는데
긴 손톱에 핑크색 젤네일 하고 다니고
반짝거리는 왕큐빅도 붙였었다.
김치는 한 번도 손톱 끝으로도 잡아본 적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핏줄이 튀어나
울퉁불퉁
못생긴 손을
피가 안 통하게 위로 몇 초 들고 있으면
손이 하얘지면서 금방 다시 이뻐지더니
이제는
올렸다 내렸다 해봐도 계속 못생겼다.
결혼하고 나서 부엌에 선 날,
손에서 음식 냄새나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나로서는 큰 결심을 했다.
장갑도 안 끼고 김치도 딱 잡고 푹푹 썰고
양파도 까고 고기도 조물조물.
지적이고 섹시하고 그런 와이프보다
배고플 때 맛있는 거
뚝딱
만들어주는 와이프.
고든 램지나 제이미 올리버 같은
세계적인 셰프들 하나도 안 부럽게
우리 집 부엌에선 최고로 맛있는 음식이
언제나 척척 만들어져 나오고
우리는 이렇게 매일 잘 먹고 산다
어깨 펴고 살게 해 주려고.
내 손이 엄마손이 되거나 말거나
마박이는 요리해 줄 때마다
밥상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마침내 우리 집 부엌에 미슐랭 3 스타를 주었다.
그나저나
우리 엄마손은 어떻게 생겼나 기억이 안 나네.
한번 보려고 한 적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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