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새벽

주도, 분투, 긴장, 단절, 안식의 이야기

by 마이즈

1. 영화관의 새벽


회사를 다니며 주말 조조 영화를 자주 봤다. 평일 동안 쌓인 피로 탓에 자칫하면 늦잠을 자게 된다. 일찍 일어나도 9시. 늦으면 점심시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전 7시 조조 영화를 예매하면 어떨까? 6시에는 일어나서 씻고 영화관까지 이동을 해야 한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오면 9시. 서점 오픈 시간에 맞춰서 조용히 신간과 요즘 인기 있는 책을 둘러본다. 조금 산책을 하다가 아점을 먹으면 11시경. 잠만 자며 낭비했을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아주 가끔은 조조 영화를 보러 온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있고 서점에서 우연한 만남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놀랍게도 이를 통해 이성 친구가 생기기도 했다. 집에서 늦잠을 잤더라면 발생하지 않을 이벤트인데 심지어 영화 한 편, 책 트렌드까지 볼 수 있다. 이동 과정에서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볼 수도 있다. 조조 영화의 너무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한동안 주말 오전은 그렇게 보냈다.

2. 학원가의 새벽


N사를 다니며 일본어 학원을 다닐 필요를 느꼈다. 그동안 일본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많이 접한 덕분에 일본어 능력 시험 3급까지는 독학으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회사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을 가지려면 학원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N사에서의 퇴근은 빠르면 23시. 보통 새벽 3-4시 정도였다. 도저히 저녁 학원을 다닐 수는 없었다. 가능한 틈은 유일하게 고정된 출근시각뿐이었다. 따라서 오전 7시 수업을 등록했다. (노 웨이 드림) 집에서 6시에는 나와야 하니 5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다. 퇴근 후 한두 시간만 자고 다시 나간다는 것. 나 좀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멋진데? 하며 잠깐 자만심에 빠지기도 했다. 강남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그랬다. 오전 7시면 학원도 막 문을 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수업을 마치고 나가는 분들도 있었고 시끌벅적했다. 이 이른 아침에 노력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잠시나마 자만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회화 반을 들었기 때문에 수강 인원은 많지 않았다. 10명도 되지 않는 인원이었는데,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한 시간 동안 일본어만 사용해야 했다. 한국어는 강사님만 허용되었다. 우리가 더듬더듬하고 있으면 설명을 해 주셔야 하니까. 그 안에 곧 60이 된다는 형님이 계셨다. 삼성 전자에서 나름 높은 직책이었는데, 얼마 전 퇴직하셨다고 했다. 더 일하고 싶지만 나이가 차면 어쩔 수 없다며. 강남역에서 수업을 마치면 선릉까지 같이 걸어가곤 했는데, 은퇴 후의 삶을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곳에서 사시려고요? 아닙니다. 허허. 일본은 나이가 더 많은 사람도 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국내 최정상 대기업에서 높은 자리에 가신 분도 이런 생각을 하시다니. 빨리 이 나라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계획은 실패했고 여전히 나는 이 나라에 있다.


3. 쇼핑몰의 새벽

광주에서 급하게 구한 공유 오피스는 쇼핑몰 안에 있었다. (아홉 번의 실수) 가장 저렴한 곳이라서 구했는데, 문제는 쇼핑몰이 오후 8시에는 문을 닫는다는 점이었다. 그 이후에는 사무실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래서 저렴했구나. 하지만 매일 서울에서 출퇴근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모텔이나 고시원 방을 구하려고 해도 비용이 아까웠다. 결국 사무실에 숨어서 지내기로 결심했다. 2인실인 좁은 공유 오피스에 침낭을 하나 가져가서 바닥에 깔았다. 대학교 랩실에 숨어서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평화로운 대학생활) 마침 내 곁에는 TS군도 있었으니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어느 날 문제가 생겼다. 화장실을 가고 싶어진 것이다. 내부 보안 장치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 수 없었고 쇼핑몰 안에는 아무런 조명도 없었다. 화장실에 가서 불을 켜거나 물을 내려도 안될 것 같았고 최악의 경우는 사무실에서 나가는 순간 비상벨이 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폐교에서처럼. (나의 호러 연대기) 그렇다고 참을 수는 없었다. 신중하게 감시 카메라 위치를 확인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소변을 보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순찰 중인 경비원을 발견했다. 상대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피하다 보니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주차장을 통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주차장 출구도 철창으로 막혀 있었다. 마치 탈출 어드벤처 게임을 하는 감각이 들었다. 그렇게 순찰 중인 경비 아저씨를 대상으로 잠입 액션 게임을 하 듯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휴대폰이 울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4. 계단실의 새벽


광주의 지원 사업을 받게 된 후 양동 시장 인근에 있는 빌딩에 사무실을 배정받았다. 처음에는 근처에 원룸을 구해서 PD님, TS군과 함께 지냈지만 오래지 않아 혼자가 되었다. 원룸 비용을 아끼기 위해 다시 사무실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지인 회사에서 버리는 라꾸라꾸 침대가 있다길래 하나 받아왔다. 매일 새벽 4시 반이면 사무실 문이 열리고 건물 청소를 담당하는 아주머니가 들어오셨다.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알람 시계나 마찬가지였다. 사무실 생활이 익숙해지던 어느 날, 밤 중에 편의점을 다녀올 일이 생겼다. 사무실은 11층이었는데, 그날따라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하고 싶었다. 11층 계단 실로 들어가서 1층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계단실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려는데… 어라?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잠겨있나 싶어서 지하 1층, 2층, 3층, 4층… 한 층씩 이동하며 확인했지만 어느 문도 열리지 않았다. 새벽 시간 동안 계단 실은 잠기는 걸까? 심지어 조금 전에 들어온 11층 문도 마찬가지였다. 계단실에 갇혀버린 것이다. 잠깐 편의점에 다녀올 생각이었으므로 휴대폰도 사무실에 두고 왔다. 덕분에 시간을 알 수도 없었다. CCTV가 있을까 싶어서 다시 1층부터 계단실 천장 구석구석을 보며 걸어 올라갔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계단실이 열리기 전까지는 무슨 수를 써도 나갈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지금 몇 시쯤이었지? 분명 12시는 넘었었는데... 계단에 쭈그리고 앉은 채 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새벽 4시경. 아래가 소란스러웠다. 청소하는 분들이 들어오셨나 보다. 계단실 문을 밀어보니 언제 잠겨있었냐는 듯이 스르륵 열렸다. 11층 복도로 다시 들어갔다가 매일 아침 인사하는 청소 아주머니를 만났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하하 네. 그렇지요. 다시 들어가서 잠을 자고 싶었지만, 청소기 소리에 시끄러울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분명 이 근처에 옛날식 목욕탕을 본 것 같았는데… 조금 헤매다가 결국 찾은 목욕탕은 준비 중이었다. 새벽 5시부터 영업합니다.


5. 목욕탕의 새벽


20대의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2주간의 도보 여행을 통해 제주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아무도 없는 목욕탕 탈의실에서 깨어났다. 잠시 후 아저씨가 들어오셨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여사친의 아버지이셨다. 어제는 푹 잤냐? 집에 방이 없어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너무 감사합니다. 2주 만에 처음으로 편하게 잔 것 같아요. 괜찮다면 좀 도와줄래? 여탕부터 가자. 아저씨를 따라 목욕탕을 가볍게 청소하고 물을 받았다. 밤에 물을 빼면서 한 번, 아침에 받기 전에 한 번 청소를 한다고 했다. 여탕에 들어간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뭐 다르지 않네. 당연한가? 여탕부터 채워놓고 남탕으로 건너왔다. 남탕도 비슷하게 청소하고 물을 받았다. 일을 마치고 나니 새벽 4시 30분. 목욕탕 오픈 시간까지는 아직 남았다. 푹 쉬고 6시쯤 건너와. 우리는 그 시각에 아침을 먹거든. 몸도 좀 씻고. 네. 냄새가 나지요?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고 우리 딸 더러운 사람한테는 못 주니까. 아니, 그런 사이 아니라고요! 아저씨는 씨익 웃으시더니 목욕탕에서 나가셨다. 자기 딸을 보려고 제주도까지 걸어왔다고 생각하시는 게 분명했다.

덕분에 아무도 없는, 심지어 물이 다 채워지지도 않은 대중목욕탕에서 혼자만의 2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목욕탕 집이 아닌 이상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이런 것이 어른의 배려라는 걸까? 그날 새벽의 온탕에서는 평소 느끼는 따듯함과는 다른 따듯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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