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둥지 증후군

자녀가 독립해 가정을 떠날 때 부모가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

by 마이즈

동생의 상견례는 한국에서 진행했다. 종로의 어느 한옥 집에 두 가족이 모였다. 나와 동생,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국인. K상과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동생의 장인은 역사 선생님이셨고, 장모는 음악 선생님이셨다. 일본인 역사 선생님이라는 말에 편견 섞인 우려가 있기는 했지만, 한국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와 미안한 감정을 갖고 계셨다. 다행이었다. 우리 가족은 전원 일본어를 할 수 있었기에, 상견례 자리는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음식은 당연히 한정식이었다. 이런 것이 글로벌인가. 상견례 자리 내내 어머니의 표정을 신경 썼다. 20여 년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자리에, 심지어 바로 옆에 앉아 있었으니까. 제발 오늘은 둘 다 얌전히 계세요. 제발. 다행히 두 분 모두 동생을 위해 잘 참고 넘겼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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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견례 후 두 사람은 먼저 혼인 신고를 했다. 결혼식은 4개월 뒤로 정해졌다. 상견례를 한국에서 했으니 결혼식은 일본에서 하기로 정했다. 동생도 긴 유학 생활을 했기에 일본에 친구가 더 많았으니까. 문제는 그 4개월의 텀이었다. 그 사이에 나는 악의적으로 편집된 SNS로 인해 마녀 사냥을 당했고, 주변 사람들이 떠났으며, 자살 기도를 했고 수억이 넘는 빚이 생겼다. (아홉 번의 실수) (버티기) 이미 사채까지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축의금조차 낼 수 없는 상황에 비행기 표를 살 돈이 있겠는가? 비참하게도 동생이 비행기 표를 끊어서 보내주었다. 나와 어머니, 그리고 사촌 여동생 J까지 세명 분이었다. 문제는 내가 재판 중이라 출국 금지가 걸려있다는 점이었다. 법원에 요청해서 임시 여권을 발급받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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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전날, 일본으로 날아갔다. 전야제로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는 동생의 강력한 요청이었다. 참가자는 6명이었다. 주인공인 동생, 그리고 나와 사촌 여동생 J,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여동생 꽃 곰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었어), 상견례 이후 여전히 어색한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나는 내내 우울했다. 빈 손으로 일본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돌아갈 전철 차비 정도를 제외하면 100엔짜리 하나 없는 상태였다. 내일이 동생의 결혼식인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이다. 미안함과 비참함이 교차하는 마음이었다. 사업은 잘 되냐는 질문에 씁쓸하게 웃었다. 결혼을 앞둔 동생을 걱정시킬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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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은 아키하바라에 있는 신사에서 시작했다. 칸다 묘진. 오타쿠라면 익숙할 텐데, ‘러브 라이브’에 등장하는 신사로도 유명하다. 결혼식 당일에도 성지 순례를 온 오타쿠들이 잔뜩 있었고, 신사에서도 러브라이브 굿즈를 여기저기 판매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웅장한 전통 결혼식이 벌어지니 이 또한 진풍경이었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동생 부부의 결혼식을 함께 관람하고 축하했다. 동생과 K상이 제일 앞에 서고 그 뒤로 가족들이 줄을 섰다. 무녀가 우산으로 두 사람을 받쳐주었다. 선두의 리더 무녀를 따라 행진을 하고 악단이 각종 전통 악기를 연주했다. 그렇게 빙 둘러 신사 안으로 들어갔다. 신사 결혼식은 가족들도 모두 식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덕분에 사진은 찍을 수 없었지만 식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신랑 신부는 술잔을 나누었고 뒤에 앉아 있던 나를 포함한 가족들도 한 모금씩 입을 적셨다. 무녀가 나서서 액막이 춤을 추고 악기와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특등석에서 전통 공연을 보는 느낌이랄까? 웅장하고 멋진 결혼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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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에서의 예식이 끝난 뒤에 호텔로 이동했다. 옷을 갈아입은 뒤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 이후에는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입구에서 봉투를 나눠 주었다. 축의금 봉투에 메시지 카드가 포함된 구성이었다. 넣을 돈이 없어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아버지가 조용히 1만 엔짜리 몇 장을 주셨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돌려드렸다. 내 돈이 아닌 것으로 축의금을 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빈 봉투에 메시지만 적었다. 최대한 짧게 썼다. 나는 하나뿐인 동생 결혼식에 축의금조차 내지 못하는 형 자격도 없는 놈이니까. 동생이 힘들어할 때마다 나를 믿으라고, 나를 의지하라고, 네 뒤에는 내가 있다고 말해왔는데. 이번에는 그저 너를 믿는다고 썼다. 이쯔모 신지루. 이마모 신지떼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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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금 봉투를 제출하자 책자로 교환해 주었다. 한국 결혼식에서 식권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책 안에는 신랑과 신부의 러브 스토리와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후 가족들에 대한 소개와 마음이 담긴 메시지, 옛 사진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잡지였다. 한일 커플이기 때문에 한글과 일본어가 모두 적혀 있었다. 살짝 아쉬웠다. 하나의 언어로만 썼다면 분량이 2배가 되었을 텐데. 동생이 나에 대한 마음을 적은 부분을 읽으며 어머니도, 사촌 여동생인 J도, 꽃 곰도 울었다.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이야기인데, 나에게만 와닿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나도 감동해서 울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여러 번 다시 읽었다. 하지만 결국 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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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에서 피로연장으로 이동했다. 웨딩 케이크를 처음 봤는데, 빵이나 크림은 거의 보이지 않고 해산물을 쌓아둔 것 같은 기묘한 케이크였다. 알고 보니 수달이 먹는 음식들로만 만든 케이크라고 했다. 동생 부부의 콘셉트는 수달 커플이었다. 둘 다 세계에 몇 없는 수달 박사였으니까. 그래서 여기저기에 수달 부부 인형이 있던 거구나. 피로연에서는 동생이 먼저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했다. 항상 어리게 보고 보호해야 할 존재로만 생각했는데, 대견했다. 부모님과 가족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신부 아버지는 건배사를 했다. 우리 아버지는 준비해 간 일본어 축사를 더듬더듬 읽으셨다. 모두 마이크를 잡고 한 마디씩 했다. 나도 무언가 말을 했을 텐데,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앞 날을 축하해야 하는 자리인데, 어쩐지 이별하는 자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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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온 이후, 한동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부모가 자식을 결혼시킬 때 드는 느낌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동생을 여기까지 키운 것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나라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유지해야 할 큰 이유가 하나 사라진 것이다. 동생은 내가 없어도 잘 해낼 수 있겠지. 더 이상 내가 지켜줘야 할 존재는 아니겠지. 오히려 녀석이 자신의 새로운 가족을 지켜가야 할 것이다. 틀림없이 잘 해낼 거야. 이제는 내가 없어도.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또다시 죽음으로의 유혹이 밀려들었다. 이를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은 동생과의 대화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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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에서 예식을 앞두고 동생과 단 둘이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몇 년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었다. (최고의 파트너)


“비행기표 고마워.”

“아니야. 형이 안 오면 내가 곤란해.”

“그렇구나.”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군지, 엄마가 이야기 자주 하지?”

“어릴 때 이야기잖아. 아직도 같아?”

“응. 형이야.”

“고마워. 하지만 이제 난 자격이 없어. 앞으로는 스스로를 존경해라.”


동생의 어깨를 툭 치고 돌아섰다. 복잡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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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의 기한이 만료되자 새로운 삶의 목적이 생겼다.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대충 살아도, 함부로 포기해도, 떳떳지 못한 일을 해도 안 되는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 대상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더더욱.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서. 이것이 나의 새로운 주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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