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돌아다니며 프로젝트를 받다.
나의 수상한 투자가는 AR에 관심이 많았다. 다양한 업체와 제휴를 진행했는데, 출판, 제약, 농사, 공원 관리, 음료수, 금융까지 온갖 분야를 넘나들었다. 심지어 보석 밀수를 업으로 하는 분들과 일을 하기도 했다. 여기저기 눈먼 돈을 주워서 우리 사업으로 끌어오는 타고난 능력자였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통해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오고 투자를 진행하면 마무리는 내가 하는 구조였다. 덕분에 오랜만에 직접 코딩 작업을 해야 했다. 대부분의 AR 앱 프로토타입은 내가 작업했으며, 그 이후 투자를 통해 개발 팀을 구성했다. 우리 투자가가 내뱉은 거짓말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이 내 역할인 셈이었다.
이 와중에 오랜만에 친구와 재회했다. 광주가 본가인 녀석은 과거 게임 분야의 파워 블로거였고, 수년 전에 잠적해서 서로 인연이 끊긴 상태였다. ‘장난감 병정’이 오랜 닉네임이었으니 이 글에서는 앞으로 토이라고 부르겠다. 그는 현재까지도 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녀석이다. 토이는 우리 투자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딘지 미심쩍어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은인이었기 때문에 토이의 말을 무시했다. 광주가 본가인 덕에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있었고, 내가 만드는 VR과 AR 앱을 보고 새로운 분야를 제안했다. 녀석은 문화재 복원을 주로 하는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디지털 복원 분야가 새롭게 커지고 있다고 했다. 그의 박사 과정 논문 주제이기도 했다.
토이의 소개로 부여 상상 뮤지엄의 디지털 콘텐츠 일을 맡게 되었다. 오랜만에 회사 이름으로 계약하고 진행하는 사업이 생긴 것이다. 우리 투자가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본인의 것이 아니고 기관의 일 중 일부를 담당하는 것뿐이니까.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도, 그렇다고 손해가 날 것도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문화재 전문가인 토이가 금동 대향로를 분석했고, 그 안에 있는 캐릭터들이 도망가면 찾아다니는 콘텐츠를 만들기로 했다. 뮤지엄 내부에 들어갈 VR 콘텐츠와 미디어 아트 콘텐츠를 개발하는 업체와도 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돈이 벌렸다. 한동안 기대고 있던 수상한 투자가와는 별개의 매출이었고, 인터넷에 괴문서가 돌았던 그날 이후 회사에 발생한 첫 매출이었다.
이 성과를 기반으로 토이는 자신이 다니는 문화재 복원 전문 건설 회사에 나를 소개했다. 회사 내부에 디지털 복원 연구소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그때부터 나는 토이와 거의 매일 붙어 다녔다. 우리 투자가가 나를 찾지 않는 날은 토이와 전국 어딘가에 가 있었다. 시 단위가 아닌 군 단위로 움직이며 수많은 군청에 쳐들어갔다. 문화 관광과가 어딘가요? 제안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지요. 지역 축제에 AR과 VR 콘텐츠의 제작 납품을 제안하거나 게이미피케이션 컨설팅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20군데 정도 쳐들어가면 그중에 10군데 정도는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중 한 군데 정도는 계약을 검토하는 단계까지 갔다. 마구 쳐들어가는 것은 익숙했다. 양말을 팔러 다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양말 사세요) 공장에 다니던 시절, 영업부에서 배운 일이기도 했다. (움직이는 게임 라이프) 종종 사람들이 물었다. 마이즈 대표님은 어디서 그렇게 일을 잘 따오세요? 잘 따오는 게 아닙니다. 많이 제안하는 것이지요. 그 1년 사이 제안한 사업의 숫자는 100개 이상은 된다.
토이가 문화재 전문가이므로 주로 역사 관련 디지털 콘텐츠 제안이 많았다. 종종 동생의 이력을 엮은 수달 사업, 환경 사업을 제안하기도 했다. 토이의 지인 중에 나대용 장군님의 종친회가 있다는 말에 이순신 장군님이 머물렀던 장소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를 엮어서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순신 콘텐츠는 눈이 높고 경쟁률은 더 높더라) 종종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을 보며 그건 게임이 아니지 않냐고 물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예를 들어 부여의 정림사지는 터만 남아 있다. 여기에 VR로 혹은 AR로 옛날 정림사를 돌아볼 수 있다면, 이것은 게임이 아닌 걸까? 놀이 공원에 숨겨진 실물 카드를 찾아 카운터에 가져가면 선물을 준다면, 이것은 게임이 아닌가? 게임의 3대 요소는 규칙과 목적, 피드백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게임이었다. 이 시기는 나에게 있어 게임을 바라보는 시야를 크게 확장시켜 주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 또 하나의 기회를 포착했다. 어딘가의 역사박물관에 갔는데, 빔 프로젝터로 쏘아진 화면에 오류 창이 뜬 것이다. 본 김에 고쳐드리겠다고 해서 뜯어봤는데, 노후된 PC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운영 체제였다. 윈도우 95를 아직까지 쓰고 있다니. PC 뿐 아니라 OS도 20년도 지난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곧바로 군청에 가서 사업 제안을 했다. PC와 운영체제를 전부 다 교체해 드리겠습니다. 수의 계약 수준으로 충분히 진행 가능합니다. 나는 용산 도매업자 출신이었다. (ATDT 01410 -ATM0) 심지어 PC방 사업도 한 적이 있었다. (PC방 매니저의 긴긴밤) 이 또한 나의 전문 분야가 아닌가? 이후 새로운 군청에 제안서를 들이밀기 전에 근처 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렇게 연결되고 소문이 나면서 지방의 어느 놀이 공원에 디지털 게임 체험관을 개관하는 일도 했다. 게이미피케이션을 활용해서 동선을 짜고 용산에서 기기를 가져다가 설치했다. 외부 업체에서 가져온 콘텐츠를 살펴보니 유아용이 많았다. 여기에서 또 하나가 번뜩였다. 그다음 목표는 키즈 카페에 있는 공 던지기 스크린 콘텐츠였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곧바로 제안서를 쓰고 키즈 카페를 돌았다.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사업은 땅끝마을 해남에 있었다. 거대한 실물 미로를 만들어둔 체험형 공원이 있었는데,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곳의 모든 것이 게임처럼 느껴졌다. 미로를 뛰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지만, 도망 다니는 해남의 마스코트 동물들을 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포켓몬 GO처럼. 이를 제안했고 그 과정에서 조경 업체와도 연결이 되었다. 동물들이 숨어있는 포인트는 토이 군과 둘이서 직접 미로를 돌아다니며 표지판을 박아 넣어야 했다. 한 여름에 그늘도 없는 나무 미로 속. 온몸에 땀이 비오 듯 쏟아졌지만 오랜만에 게임 다운 게임을 만드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미로를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후 매표소 주변에 스티커와 QR 마커를 붙이는 일까지 모두 단 둘이서 진행했다.
이후 기관과 기관 사이에서 서로 소개를 해주었는지, 다양한 지역에서 연락이 왔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토이 군과 둘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광주 사무실에서 강제 퇴거 당하는 일이 생기자 사무실 짐을 토이 군 부모님 별장으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 한동안 정말 큰 은혜를 많이 입었다. 녀석과 일을 많이 하게 되면서 이 쪽이 주력이 되었고 수상한 투자가는 조금씩 나에게서 멀어졌다. 물론 여전히 내가 꼭 필요하다고 부르는 경우는 기꺼이 다녀왔다. 그는 여전히 나의 은인이었으니까.
광주의 지원으로 동경 게임쇼에 VR 게임을 출품하고 다녀왔지만, 계약은 지지 부진했다. 한참 뒤에 영등포에 있는 VR 게임방에 납품에 성공했지만 지방에서 한 건의 계약을 진행하는 수준보다 한참 낮은 매출이 발생할 뿐이었다. VR 콘텐츠는 혼자 만들기에는 다소 무겁다. 자금과 수익의 비효율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당시의 VR 시장과 AR 시장은 자생력이 부족했고, 모바일 게임도 퍼블리셔의 힘이 막강했다. 경쟁력 없는 게임을 계속 만드는 것이 맞을까? 나는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 당분간은 다른 쪽으로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채 업자가 집까지 찾아갔다는 연락이었다. (버티기)
토이는 다음에는 연극 무대의 미디어 아트 일을 가져왔다. 당시 미디어 아트가 막 생겨나던 시절이라서 단가가 말도 안 되게 부풀려져 있었다. 원본을 가지고 애프터 이펙트로 조금 만지면 되는 수주인데, 엥? 이게 한 장에 500만 원? 헐, 이건 2,000만 원이라고? 100만 원 정도로 외주만 주더라도 만들 수 있는 수준의 리소스들이었다. 이거 남는 돈이 엄청난데? 누가 보더라도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왠지 끌리지 않았다. 재미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돈이 필요한데 왜 이러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곰곰이 자신을 돌아봤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냈다. 이 일은 토이 네가 해라. 다른 사람 주던가. 난 아닌 것 같아.
이후 토이를 통해 큰 프로젝트가 하나 들어왔다. 울주군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를 디지털 콘텐츠로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국내 최정상 영화 CG 제작 업체와 협업을 하게 되었다. 그쪽에서 그래픽을 만들면 우리 쪽에서 리터칭을 하고 콘텐츠화하는 구조였다. 그래픽 전문가는 많았지만, 엔진을 다루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덕분에 내 롤을 찾을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울산 진흥원의 일이었는데, 디지털 콘텐츠 담당자가 없다 보니 어쩌다가 내가 기술 감수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키오스크 개발도 참여했다. 하드 웨어 업체와 연계해서 망원경 형태의 VR도 개발했다. (이 망원경은 토이가 특허권을 갖고 있다.) 프로젝트가 무사히 종료되며 국회에서 시연까지 진행하게 되었다. 하나의 성과는 언제나 다음으로 연계된다. 울산 진흥원은 다음 프로젝트로 드론 슈팅 게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레이저 서바이벌의 인식기를 드론과 결합하고, UNIST의 드론 편대 비행 전문 교수님과 함께 진행하는 건이었다. 드론을 직접 총으로 쏴서 떨어뜨리는 게임이라고? 내가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키오스크와 망원경 하드웨어, 다음은 드론, 다음은 방 탈출이었다. 축제 용으로 일회성 방 탈출 체험을 디자인했다. 울산 진흥원에서 보는 나는 뭐든 다 시킬 수 있는 기술자가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다음 기회는 더욱 어마어마했다. 당시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기술, 홀로그램이었다. EBS와 울주군이 엄청난 규모의 비용으로 번개맨 우주 센터를 건립한다. 그 안에 홀로그램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다만 홀로그램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대전에 있는 ETRI에서 기술 이전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미 공문을 보내서 날짜까지 잡아두었다고. 그런 엄청난 기술 이전을 제가 받아요? 그럼 마이즈 님 말고 누가 있어요? 불만인척 했지만 내심 기뻤다. 입구부터 보안 체크를 받고 휴대폰도 가린 채 연구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홀로그램 콘텐츠를 체험하고 기술을 이전받았다. 여기에 말할 수는 없지만, 다소 맥이 빠지는 기술이기는 했다.
이때 전국을 돌아다니며 했던 다양한 일은 나의 시야를 넓혀 주었으며, 동시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동안 모바일, PC, 보드 게임만 만들던 내가 VR, AR, 홀로그램, 게이미피케이션, 전시관 구성, 디지털 아트, 하드웨어, 드론, 방 탈출, 디지털 복원, 장비 교체, 건축과 정부 사업까지 영역이 확장된 것이다. 동시에 내가 생각하는 게임의 기준 또한 넓어졌다. 회사 직원 10명 이상이 함께 개발하던 1년간 매출보다 토이 군과 단 둘이 돌아다니며 혼자 개발하는 한 달 매출이 훠얼씬 컸다. 반면 비용도 훠얼씬 적게 들어갔다. 나를 고소한 옛 동료 중 하나가 말했었다. 저 사람은 무능력해서, 우리들 없으면 혼자 아무것도 못합니다. 나의 행동으로 그 말에 대한 반박을 보여준 셈이다. 덕분에 나의 자존감 또한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다.
주변 분들이 자주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나요? 그런 질문을 들으면 항상 같은 답변을 했다. 그냥. 살려구요. 살고 싶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