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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Jul 07. 2021

동물농장 2021(8/10)

<제8화> 우물 안 개구리 차므리의 탈출

옵핸드는 아직 기획도 없는 플랫폼의 마케팅을 위해 10년 경력의 마케터 딱따구리 꼰대리를 영입하며 이렇게 말했다.


실버드님 가라사대, 지금 우리가 투자를 못 받는 것은 마케팅 플랜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조인한 꼰대리는 여러 스타트업을 거치며 잔뼈가 굵은 베테랑 마케터-라고 이력서에 쓰여 있었다. 면접에서 보여준 그녀의 모습은 후배 양성의 사명감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자랑스러운 딱따구리였으며, 신입과 인딴으로 이루어진 이 조직의 성장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게다가 여성 팀장이 있다는 것은 정부의 지원을 받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신입 마케터로 6개월째 삽질을 하고 있던 개구리 차므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리저리 다른 동물들에게 치이며 헛간에서 풀 정리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드디어 사수가 생기는구나!


차므리는 요래요래 개굴개굴 귀염 짓을 하며 사랑받는 팀원이 되기 위해 애썼다. 딱따구리 꼰대리도 차므리를 아꼈다. 그렇게 둘이 붙어 다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밥도 같이 먹고, 쇼핑도 같이 하고, 네일도 같이 하러 다니는 등, 팀장-팀원을 넘어 자연스레 절친의 경지에 다다르는 듯했고, D동 헛간에서 이 둘이 친한 것을 모르는 동물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통통 튀는 입담과 쌈박한 아이디어를 보여주었던 개구리 차므리가 부쩍 말 수가 줄어든 것은 둘의 절친 인증 얼마 후부터였다. 여전히 둘은 붙어 다녔지만, 더 이상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지 않았다.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날개로 뒷짐을 진 꼰대리가 앞장을 서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차므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잔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더 이상 점프를 하거나 개구르르 하는 일도 없었다.


"너, 도대체 일을 어디서 이렇게 배웠니?"


꼰대리가 긴 부리로 차므리의 매끄럽고 작은 머리를 쪼았다.


"이번 주말에는 뭐 했는지 읊어봐. 그렇게 해서 '진정한' 마케터가 될 수 있겠어? 라떼는 말 안 해도 일 잘 못하는 애들은 주말에 나와 일했어.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내가 그런 것도 일일이 알려 줘야 될까? 딱딱?


너 이런 말 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는 줄 아니? 이 헛간에서 너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나뿐이야. 나 니까 너한테 이런 충고 해 주는 거라고. 딱다닥”


하루에도 몇 번씩 관리동 옥상으로 끌려가 혼나고 있는 차나리가 목격되었고, 울트라초특급마이크로매니지먼트의 달인 꼰대리의 닦달에 차므리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져 갔다. 차므리는 꼰대리 처럼 먹고 꼰대리 처럼 입었다. 그러나 개구리가 딱따구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일이면 동물원으로 돌아갈 예정으로 헛간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기린 마릴린이 멍한 눈의 차므리를 발견했다.


"차므리씨, 요즘 잘 지내죠? 그동안 바빠 보여 말도 못 걸었네. 나 오늘이 마지막 날이에요. "


마릴린 님. 전 왜 이렇게 못났을까요. 일을 왜 이렇게 못하는 거죠. 정말 미치겠어요. 매일 혼나기만 하고 일이 늘지 않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따다다다닥


차므리가 딱따구리처럼 울기 시작했다. 마릴린은 평소 갑자기 우는 동물들을 상대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나 20대의 마릴린도 탕비실에 서서 혼자 훌쩍거리곤 했었다.


"무슨 소리예요 차므리씨. 차므리씨는 잘하고 있어요."마릴린은 무턱대고 긍정의 만트라를 읊어보았으나 상대에게 먹히지 않자 어색하게 그 자리를 떴다.


옵핸드는 자기 일할 시간까지 쪼개서 차므리의 일을 성심껏 봐주고 있다는 꼰대리가 믿음직했다. 그는 마케팅에 2명은 필요 없으니, 다음 주에 돌아오는 인딴 대이동(퇴사)에서 차므리를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행력 갑인 옵핸드. 즉시 농장 전 직원을 불러 모아, 모든 인딴과 차므리는 내일 나가라고 방송했다.


"동지 여러분, 다음 주 새로운 인딴들이 대거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데, 책상이 부족합니다. 기존 인딴과 차나리는 모두 농장을 나가주시기 바라겠습니다."


해당이 되는 인딴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딱따구리 꼰대리가 뛰어나와 옵핸드의 뒷다리를 물고 매달렸다.  


"옵핸드님, 시간을 주십쇼.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 월급을 나눠서 차므리에게 주셔도 됩니다. 가르칠 후배 없이는 저의 커리어가 완성되지 않아요. 제 사명은 후배 양성입니다. 이들을 가르쳐야 해요. 지도할 사람이 없는데 제가 여기 있어 무슨 소용입니까."


"차므리, 지금 뭐 하고 있니? 빨리 너도 와서 옵핸드 영감에게 빌란 말이야. 내가 피 같은 내 월급까지 너와 나누려고 하고 있는데, 넌 거기 멍하니 서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너 나가면 어디 갈 데가 있을 줄 알아?, 차므리, 넌 나 아니면 안 돼. 정신 차려."


당황한 차므리가 홀린 듯 앞으로 뛰어 나가려고 할 때,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내일 나가는 기린 마릴린이 모른 척 발을 걸었다. 그리고 넘어진 차므리를 일으키며 속삭였다.


어딜 가요. 지금이 딱따구리 우물에서 탈출한 기회인데.


찬물에 얻어맞은 듯 정신을 번쩍 차린 차므리가 개굴 거리며, 그 길로 다른 농장으로 일을 찾아 떠났다.




Photo by William Warb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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