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끼니는 무척 중요하다. 지금까지 살면서 끼니를 걸러 본 적이 거의 없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 같다. 결혼 생활 17년 동안에도 끼니를 걸려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눈치 없게 아내에게 밥 차려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차려 먹는다.
나는 왜 끼니에 집착할까? 나에게 밥은 일종의 의식(儀式)이고 루틴이다. 밥을 먹지 않으면 무슨 일이건 스타트가 되지 않는다. 일을 하든, 놀든, 산책을 하든 반드시 밥을 먹고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끼를 먹어도 잘 차려서 먹는 것 이 아니고, 한 톨을 먹더라도 거르지 않는 것이 내 삶의 신조다.
여성들은 밥은 못 먹어도 화장은 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세수를 못할지언정 밥을 굶고 출근하지 않는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총각시절 어머니는 항상 아침밥을 차려 주셨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은 새벽 5시에 밥상을 차리시기도 했다. 괜찮다고 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밥은 나의 정체성이고 자존감이다. 어머니와의 추억이고 약속이다. 성인이 되어서는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먹기보다 생존을 위해서 먹었던 것 같다. "내가 살아야 너도 살고, 내가 살아야 너도 살린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비장하게 밥을 먹어야 하느냐고 물을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밥의 의미는 그렇다. 끼니를 해결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같다. 원래 기본적인 것이 가장 어려운 것 아니겠는가. 요즘은 혼밥도 즐긴다.
회사에서는 직원들과 밥을 먹고 집에서는 가족들과 밥을 먹으니 혼자 밥 먹는 시간도 즐거움과 자유로움이 있다. 사람의 심리가 그렇다. 혼자 있으면 같이 있고 싶고 같이 있으면 혼자 있고 싶다. 미혼일 때는 결혼이 부럽고 결혼하면 미혼이 부럽다.
이 심리를 심리학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것과 동일한 증상이라고 하더라. 학술적으로다가 무슨 동일시라고 하던디. 학술적인 것은 학자들이 알아서 정리할 일이고, 아무튼 크리스천이 주일을 어기면 안 되는 것만큼이나 내게 끼니를 거른다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다.
오늘 아침은 딸과 병원에 갔다 왔고,
저녁에는 아내와 병원에 갔다 왔다.
아, 또 있구나. 딸 학원 바래다주고 학원에서 픽업하고,
김밥 15줄 말고.
오늘도 최선을 다했다.
밥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