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 동백꽃 프러포즈
나는 아주 심플한 연한 하늘빛 청바지에 청 자켓을 걸치고 커다란 금색 목걸이와 파랑 구두로 멋을 낸 채 커다란 검정색 에나멜 가방을 둘러메고 버스에 올라탔어. 몸무게가 44kg을 넘지 않을 정도로 마르고 날렵했기에 발걸음 또한 가볍고 경쾌했지. 마침 1번 좌석표라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아 버스 출발을 기다리며 서울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할 일을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지는데 버스가 출발했어. 그런데 순간 뒤에 앉아있던 남자가 내 자리 옆에 와서 앉는 것이 아니겠어?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탄 버스엔 그 남자와 나 딱 두 명만 타고 있었는데 굳이 내 옆자리에 와서 앉는 이유가 뭘까? 의아한 생각이 든 순간 그 남자가 말했어.
“대전까지 가시죠?”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거야? 본인도 대전에서 서울 가는 고속버스를 탔으면서?
“ 아.. 네.. ”
“ 함께 이야기 좀 하면서 가도 될까요? ”
“ 아.. 네.. ”
“ 서울 어디 가요?”
“ 아.. 친구들 만나러 신촌에 가요. ”
“ 아.. 저는 관악구에 가는데... ”
“ 아.. 네..”
“ 그런데 누구를 만나러 가세요?”
“ 아.. 친구들을 만나러 가요. ”
“ 남자 친구는 아니겠죠? ”
“ 남자 친구 없어요. ”
“ 그래요? 그것 참 잘되었네요. ”
“ 왜요? ”
“ 아.. 그냥 잘 된 것 같아요.. ”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서울까지 끝이 없이 이어졌고 심지어 그는 나를 신촌의 약속장소까지 데려다 주었지 뭐야. 헤어지면서 그 사람이 말했어.
“ 다시 만나고 싶은데요.... 사실 제가 세 달 뒤엔 미국으로 유학을 갑니다. ”
“ 그래요? 내가 다니는 학교에 찾아오시면 만날 수 있을 거에요. ”
1988년, 그 당시엔 집 전화 이외엔 거의 연락수단이 없었던 시절이었을 뿐만 아니라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으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간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어. 그런데 그 남자 꽤 단호하더라?
“ 대학원 수업이 없는 다음 주 화요일에 꼭 전주대로 찾아가겠습니다. 사회교육과 맞죠? ”
나는 기어코 다음 주 화요일에 내가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야 말았어. 글쎄 그 남자가 진짜 학교 사무실로 찾아온 거 있지? 그래서 갑자기 우리 과 스타가 되었지 뭐. 금은형 남자친구 없다고 그러더니 거짓말했다면서 동기들은 물론 선후배들까지 난리가 났었어. 그뿐인 줄 알아? 그 남자가 글쎄 넥타이에 양복까지 입고 왔더라? 27세의 남자가 그렇게 근엄하고 묵직할 수 있는 거야? 아무튼 자신한테는 너무나 중요한 날이라서 옷을 갖춰 입지 않을 수 없었다고 나한테 장황하게 설명까지 하더라구. 난 창피해죽겠는데 말이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남자의 존재를 학교에서 빨리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기에 무조건 택시를 타고 시내 ‘반고흐 커피숍’으로 가자고 했어. 그런데 이 남자가 택시 기사님에게 커피숍이 아닌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달라고 하는 거야. 내가 “도대체 무슨 영문이야? 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빤히 쳐다보니까 그 남자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라?
“ 은형씨하고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마침 전주라서 멀지않더라구요. 선운사 알아요? 눈물처럼 지는 그 꽃! 동백꽃 숲이 울창하게 둘러싼, 송창식 노래 들어보셨죠?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은형씨하고 그곳에 가고 싶었어요. 괜찮죠? ”
황당했겠다고? 아니! 멍했어. “도대체 이 도깨비 같은 남자가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도대체가 알아들을 수도 없네”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갸우뚱해지는? 뭐 그런 감각? 그런 현실?
달리는 버스에서 그 남자는 마치 ADHD 어린아이처럼 산만하고 부산하고 뭔가 종잡을 수 없는 느낌으로 말을 했다가 혼자 실실 웃고, 실실 웃다가 입을 다물고, 다시 말을 걸어오고를 반복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는 느낌? 대략 난감했지만 그 남자와 나는 벌써 선운사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지.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 순간부터 난 이 남자가 너무너무 고마워지더라? 이미 내 눈과 내 머리와 내 마음 속에 옆에 있는 남자는 지워지고 선운사로 걸어들어가는 아름다운 길이 가득 담겨왔기 때문이야.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준 이 남자가 천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감탄을 연발하며 하며 고맙다고 말하니까 얼굴까지 붉어지며 기뻐하더라.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그 꽃, 동백꽃이 핀 선운사에 가봤어? 나무에 핀 꽃보다 떨어진 붉은 꽃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난 난생처음 알게 되었어.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한 송이 집어 들고 노랑 꽃술에 코를 박고 눈을 지그시 감고 향내음을 맡아보는데 잊혀졌던 남자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어.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한 송이 손에 쥐고 말이지. 서로 눈이 마주쳤는가 싶었는데, 그 남자가 바로 오른발을 뒤로 접어 앉으며 몸을 낮추고 나에게 그 꽃을 바쳐 올리며 뭐라고 했는지 알아?
“ 나와 함께 유학 가겠다고 말해주세요. 은형씨와 함께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
분명 고백이었겠지? 하지만 난 어안이 벙벙했어. 스물두 살이 되도록 연애 한번 못해본 내가 그토록 고난도의 사랑고백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사실 무모함이거나 불가능이거나 둘 중 하나야. 더군다나 버스에서 딱 한번 만난 사람과 선운사에 간 것도 비현실적이고 우주적인 느낌인데 미쿡까지? 하지만 그래도 왠지 약간의 설렘과 쑥스러움과 민망함은 훅 올라오더라? 꽃을 받았지만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쑥스러운 듯 씩 웃고 말았지. 어쩌면 내 일생을 통해 가장 신선하고 귀여운 수줍음이었을지도 몰라.
“ 어? 은형씨 웃었죠? 진짜 웃은거 맞죠? Yes 라는 말이죠? 하하하 진짜 기분 좋아요. 함께 미국에 가기 전까지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 수 있도록 자주 자주 만나요. 유학준비로 바쁘지만 내가 매주 대전이나 전주 어디든 은형씨 있는 곳으로 갈께요. 은형씨 부모님도 뵙고 함께 유학 가는 일에 대해 허락도 받고 은형씨 학교 문제도 상의 드리구요. ”
뭐래? 두 번 만나고 결혼승낙이라도 받자는 말처럼 들리잖아? 땅에 떨어진 동백꽃 한송이 주워주고 맘대로 진도를 막나가는 당신이란 남자는 도대체 누구야? 뭐야? 나는 또 뭐지? 버스에서 만난 남자가 서울에서부터 찾아왔다고 선운사까지 따라온 나는 뭐냐구? 남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착각하게 만든 내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 나는 나를 찾아온 손님에 대한 예의로 동행한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지. 그때 남자가 내 팔을 살짝 자기 쪽으로 잡아끌더니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어.
“ 은형씨한테 선물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오던 길에 극락교가 있던데 생각나요? 그 다리를 먼저 건너가요. 그곳에서 지난 일주일 동안 은형씨 생각하면서 준비한 선물을 드릴께요.”
극락교를 건너면 마치 천국과 같은 극락세계가 펼쳐지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그곳에서 선물을 주고 싶다는 것이었어, 모두 토 나올 것 같은 기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남자가 그러는데 내가 지난주 버스에 올라탄 순간 천사를 본 듯했다는 거야.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맨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강력한 자석에 끌리듯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내 자리로 옮겨 앉았다는 이야기였어. 이야기를 듣다 보니 벌써 극락교를 건넜고, 남자의 이야기가 흥미를 끌면서 왠지 나도 어떤 선물을 준비했을지 기대가 되더라?
남자는 먼저 편편한 바위 돌을 찾아서 자신의 손수건을 깔더니 나보고 잠시 그곳에 앉으라고 하더라고. 좀 흥미진진하지 않아? 도대체 어떤 선물을 준비했길래 극락교를 건너 천국도 모자라서 손수건을 깔고 권좌에 나를 앉히기 까지 하다니..... 나는 그 남자의 손을 바라봤어. 두 손 중 어느 쪽에도 가방도, 선물도 들려 있지 않았어. 그렇다면?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상자? 아이 보리색 리본으로 아쿠아 블루컬러의 티파니의 작은 상자? 아니면?.... 헉! 그런데 더 이상 나의 상상력은 필요하지 않았어. 이미 그 남자가 선물상자를 열었기 때문이었지.
“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
도대체 극락교를 건너서 천국과 같은 극락에서 내가 싫어하는 가곡을 부르는 이유가 뭘까? 갑자기 남자가 입고 온 양복과 넥타이도 촌스러워 보이기 시작하고, 그 남자가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나의 멀미와 구토감은 더욱더 심해졌어. 진지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것은 더더욱 싫더라?
“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값있게 살아가리라~~~♪� “
드디어 마지막 소절을 그 남자가 열창하고 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어.
“흡 ~~”
남자는 깜짝 놀라서 차멀미가 생각보다 심했던 것은 아니냐며 내 등을 두드려 주려고 하더라? 그런데 남자가 내 등을 한 번 두드리자마자 이번엔 진짜구역질이 나오더라고
“우웩~~”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뭘 굳이 물어봐?
그 남자는 그냥 애인 없는 내 초라한 일상을 커버해주는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되었지.
“ 내가 부족해서 애인이 없는게 아니야! 서울대 대학원 나와서 유학 준비하던 훤칠하고 멋진 남자가 양복까지 차려입고 와서 꽃을 바치고 노래까지 불러주면서 자기와 함께 유학가자고 프로포즈까지 했었어. 그런데? 내가 거절했지. 왜냐구? 왜냐면.... 음... 왜냐면.... ”
극락교를 건넌 것이 잘못이라고, 생이 없는 천당과 극락은 멀미나는 세계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
“ 니들이 극락교 건너 순결하고 영원히 값있게 살아가는 삶의 구토감을 알어?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내 사랑인 목련꽃도 추하게 지고 만다는 진실의 구토감을 아느냐구? 그래서? 그 남자와는 선운사 동백꽃처럼 통째로 툭 떨어지고 말았지. 바람 불어 설운 날, 선운사 동백꽃을 주어들고. 목련화를 듣던 그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