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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Dec 17. 2022

토요일, 오전 9시

업무 시작합니다

백수인 나는 매일 아침 9시가 되면 식탁으로 출근을 한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앉아 있을 때도 있지만 그건 출근이 아니다. 식구들 아침밥 챙겨 먹여 출근시키고 청소하고 이것저것 한 후에 커피를 한잔 준비해서 식탁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면 어김없이 9시다. 30년 넘게 9시에 출근해서 일을 해서일까.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식탁에 탁 앉으면 9시. 


올 초 코로나에 걸렸을 때도 9시면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었다. 그때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중이었고 코로나에 걸리든 걸리지 않았든 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늘 산더미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나는 왜 이러는 걸까.


일주일 동안 남편이 일이 없어서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9시만 되면 식탁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심각하게 자판을 두들겨 대는 것을 보고 묻는다.


너 뭐하냐?


어, 출근.


사실 대단히 하는 것은 없다. 관심도 없는 취업사이트를 뒤지거나 글을 쓰거나하며 웹서핑을 한다. 책도 읽고 톡으로 수다도 떤다. 그러다가 11시가 되면 걷기 운동을 하러 나간다. 그래도 나는 어김없이 9시가 되면 노트북을 켠다. 오늘 아침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남편이 묻는다.


오늘은 출근 안 하냐?


어, 주말.


아 토요일이었구나... 한다. 그럼! 백수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 토요일은 쉬라고 있는 것이니까요. 전에는 토요일이 제일 바빴다. 일주일 동안 먹을 음식을 준비해야 하고 밀린 빨래와 묵은 청소를 해야 했다.  여튼, 눈이 펑펑 내리는 토요일 아침 9시 오늘! 이 양반이 갑자기 TV위쪽의 창문을 떼어낸다. 그러면서 막 닦고 난리 났다. 왜 이러는 걸까요?

 

할 수없이 나는 창틀을 닦았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밖으로 나가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창틀을 닦는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왕 닦는 거 꼬리빚까지 챙겨서 구석구석 닦아냈다. 계단에서 내려오다 어제 내린 비에 고여있던 물이 얼었었는지 조심을 했는데도 벌러덩 넘어지기까지 했다. 


30년 동안 창문이고 뭐고 닦는 일이 전혀 없던 사람이 왜 하필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이러는 걸까요? 
밖에서 창틀 닦던 당신 마누라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습니다!


구시렁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서자 남편은 눈이 잔뜩 묻은 내 무릎을 보고 미안해한다. 미치신 것 아니냐고요.


그렇지만 나는 이해한다. 창문 물기를 닦을 수건을 건네고 옆에서 돕는다. 사람이 집에서 쉬는 날이 길어지면 뭐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 미칠 지경이 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 내내 내가 해주는 삼시세끼 꼬박 드시고, 중간중간 잠을 자고 유툽 보는 일이 전부였던 남편이 지금 한계치가 온 거다. 할 일 없어 돌아버린 내가 다른 창문과 창틀은 다 닦았지만, 여기 하나 잠시 보류해 놓았던 것을 매의 눈으로 발견하고는 실행한 것이다. 다행이다. 오늘은 눈도 치워야한다. 할게 많다.


토요일 오전 9시. 우리는 청소부로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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