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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일이 아닌 것은

9화. 지금의 당신 덕분이고

by 윤혜림


글에 기댄 이 한 명 있다. 가끔은 글을 붙잡고 살려달라 빌기도 한다. 주먹질을 간신히 버틴 채 덜컹이는 문 안에서는 지원이 펜을 잡고 앉아있다. 뾰족하게 날을 세운 펜으로 목이라도 찍어 누르는 것이 지원의 삶을 고요케 할 가장 손쉬운 방법이겠으나, 그렇게 해서 죽을 수 있는 지도 의문이고 또 죽기에는 왠지 모르게 아직은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지원은 차라리 글을 쓰기로 한다. 열다섯 지원의 동공은 쉼표도 없이 몰아치는 문 밖의 욕지거리에 까뒤집힌 지 오래다. 방언처럼 줄줄이 쏟아지는 글씨들은 종이에 끈덕하게 달라붙어 피비린내를 풍긴다. 방문은 금방 열렸다. 지원과 근용이 충혈된 두 눈이 서로 맞부딪히는 순간이다.


증오가 시작되는 지점은 지나치게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지원은 어렸고 구구단이 싫었다. 근용은 허리가 아팠고 정상적인 회사 생활이 힘들었다. 딸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는, 일상이 망가진 한 남자는 하루가 쌓일수록 딸에 대한 미움을 쌓아갔다. 딸이 구구단을 한 번 틀릴 때마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한 번씩 증명받는 것 같았다. 지원과 근용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철천지 원수가 되어 가는 평범한 길 위에 있었다.




- 그런데 또 그게 별 일은 아니었어. 누구나 다 이 정도는 겪고 살지 않았나 싶어.

덕분에 나는 남자 보는 눈만 높아졌지 뭐.

그래서 이렇게 오빠 만나고 있는 거야. 잘된 거라고 봐.

그렇지 않아? 빨리 동의해 줘.

적어도 오빠는 나한테 구구단 외우라고 다그치지는 않잖아.

커피 한 잔 내려줄까?




지원과 민성은 오십 층짜리 높은 건물 사이로 햇살이 빗겨 들어오는 2호점에 나란히 앉아 있다. 오후 네시면 지원의 공간 깊숙하게 따뜻한 빛이 들어온다. 민성은 이 순간을 가장 좋아한다. 빛을 따라 화분들을 줄지어 옮겨 놓는다. 그들 모두의 광합성 시간이다.


지원은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서버에 가득 담는다. 민성이 좋아하는 케냐 원두를 두 스푼 떠서 그라인더에 넣고 간다. 갈린 원두를 드리퍼에 깔린 여과지에 담는다. 데워진 물을 한 번 붓고는 가만히 들여다보고 고개를 들어 민성을 살핀다. 다시 물을 붓고 또다시 민성을 살핀다. 한 번 더 반복. 한 번 더. 지원이 그 루틴으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민성은 밖을 쳐다보는 데 여념이 없다. 2호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들 중 치즈태비가 매장 앞에서 배를 까고 누워있다. 지원과 민성은 2년 전 민성네 시골집에서 허피스 바이러스에 걸린 고양이 두 마리를 구조해 왔는데 지금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 그 이후로 민성은 길고양이만 보면 눈을 떼지 못한다. 지원은 그런 민성의 다정함을 좋아한다. 그 다정함을 먹고살면 가슴속에 끈적하게 눌어붙은 과거들도 언젠가는 때 밀리듯 벗겨 없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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