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원

1화. 언니는 꼭 그러더라

by 윤혜림


지현과 지원은 같은 서울 지붕 아래 산다. 일 년 만에 얼굴 마주 보고 앉자마자 지현이 지원을 향해 꺼낸 말은 타박과 통보였다.



- 언니는 꼭 언니 생각만 하더라. 나는 울산으로 내려갈 거야.


- 울산 내려가서 뭐 할 건데.


- 뭘 하든. 나는 엄마 옆에 있을 거야. 언니는 서울에서 계속 그렇게 꿈꾸고 살아.



지원은 밤새도록 진탕 처맞고 이젠 진짜 죽어야겠다 싶던 열아홉 새벽이 떠올랐다. 삼디다스 질질 끌고 교회 들어갔던 새벽이 생각났다. 성격이 원체 모나고 삐딱해서 하나님이고 부처님이고 그런 거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절보다는 교회가 집에서 가까워서 들어간 거였다. 거기 가니까 세수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를 몰골로 앉아서 끝없이 아멘 아멘 외는 사람이 되게 많았는데, 그렇게 될지어다 그렇게 될지어다 고개 땅에 박고 깍지 낀 손가락 마디마디 멍드는지 모르는 사람도. 그럼 지원은 그 사이에서 십자가 꼬나보고 묻는 거다. 살아가는 일 얼마나 위태로운 거면 잠이라도 잘 자게 해달라고 침대 머리맡에 드림캐쳐 걸어다 놓고, 차마 잠들지 못한 새벽녘엔 산등성이 올라 보잘것없는 돌멩이로 탑 쌓고 빌어도 보고, 그래도 안 되겠어서 해뜨기 전 서둘러 십자가 앞에 자리 잡고 마침내 목숨 구걸하는 사람들 이렇게나 많냐고. 돈 없고 운 없어서 손가락질받는 것들 여기 다 모여서 울고 있는데 그 눈물 받아먹는 당신은 계획이랄 게 뭐 있냐고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주제 없고 요점 없는 물음을 토해내던 지원이 터덜 거리는 발걸음으로 교회 밖으로 나오면 어느새 해는 뜨고, 쓸데없이 성실한 아침은 새로이 시작된다.



- 어쨌든 언니, 이사 날짜도 정해졌어.


- 응. 그럼 못 이기는 척 살아야지 그렇지. 까시 삼켜내는 기분으로 다시 지옥 같은 집 문 열고 들어가야지. 바닥에 널브러진 소주병 쪼가리들 한쪽 구석에 밀어놓고 앉아서 끓여 먹는 라면이 맛있길래 또 하루 참고 견디다 보니 어찌 이때까지 살고 있네. 머리칼 보듬는 사랑 없이도 어른이라 불릴 나이까지 살았네.


- 갑자기 뭐라는 거야?


- 됐어. 얘기 다 끝났으면 일어나자.



잠실역 버스환승센터에서 지원과 지현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걸었다. 붐비는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지원은 눈앞이 오래된 형광등처럼 깜빡거리는 걸 느끼고 어깨에 걸쳐진 가방끈을 더 세게 움켜쥔다.



사실은 있잖아, 시간 흘러 어쩌다 알게 된 삶의 철칙은 나 어릴 적 뺨 위에 새겨진 손바닥 자국보다도 매섭고 야박스러워. 적당히 나이 먹고 무언가 적당히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되면 아무도 이 서럽고 지겨운 서사 들어주지 않더라고. 포옹이나 위로 대신, 애지간히 외롭지 않은 인생 어디 있으며 우울하지 않은 인생 어디 있냐고 되물어. 바닥 기어서 연명했더니 이젠 그런 거 따질 때 아니라잖아. 허리 곧게 펴고 입꼬리 올리고, 평범하지만 유복한 사람이 되어야 할 때인 거야. 그럴 때는 사람 말고 꿈 믿어야 돼. 꿈이라는 단어 지지리도 촌스럽긴 한데, 세상에 꿈만큼이나 단단하고 묵직한 종교가 어딨어. 돈 없고 운 없는 모지리가 꿈 앞에서 눈물 콧물 쏟아낼지라도 꿈은 나 두고 어디 안 가. 바람 분다고 넘어진 모지리 한 번 두 번 일으켜주다가 세 번만에 질려서 홱 가버리고, 사람처럼 그러지도 않아. 어른이 되어갈수록 촌티 나는 꿈 믿으면서 살고 싶은데.



지현은 이런 지원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의 바람이 콧속을 뾰족하게 파고들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