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부지런함을 버리기, 쉬어가는 법을 배우기, 흐름에 역행하는 용기
게으름이라는 말은 만국공통 어디에서나 항상 부정적인 단어에 속한다. 하지만 나는 굉장히 좋아하는 단어다. 내가 나 자신을 소개하고 설명할 때 이 laziness를 갖다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개방적이고 진보적이며 다양성을 아주 중요시하는 이 샌프란시스코의 spiritual care 업계에서도 뜨악하는 반응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게을러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목회를 처음 시작하던 군대에서, 훈련소에 처음 들어가 장교교육과정을 밟을 때 처음 이게 뭔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대라는 곳은 사람을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이로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환경이다. 군종장교로 입대한 사람들은 모두 사회에서 이미 성직자로서 신도들을 이끌어오던 존경받는 성인들이었지만, 훈련소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발가벗겨지고 배고픔에 시달리고 조교의 겁박에 주눅이 들다보니 더이상 성인이 아니었다. 나는 정확히 그 때 나의 모습, 나의 뇌구조는 중학생에 다름없었다고 믿는다. 당장 시키는대로 아무생각없이 열심히 죽을힘을 다해 담요에 각을 잡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안하면 큰일난다고 믿게된 동료들을 보면서 어느 순간 느꼈던 것 같다. 다들 눈이 멀어있고 나만 세상이 보이는 주인공이 나오는, 굉장히 불쾌하게 봤던 그 sf영화의 한 장면같다고. 이게 다른 말로하면 가스라이팅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후에 부대에 가서 부조리와 괴롭힘을 당하는 군인들을 수없이 만나면서 더 확신하게 되었다. 이게 바로 대한민국의 법칙인가보다 라고. 마치 피리부는 사나이를 향해 달려가는 쥐떼 안의 한 마리처럼, 생각을 하지말고 열심히 부지런히 치열하게 달리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사회와 환경, 구조, 사람들, 원칙, 세상 전부가 말이다.
다시 훈련소 때의 나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면, 처음의 나는 그저 담요를 왜 네모반듯 뾰족하게 접어서 훈육관에게 보여줘야 하냐며 투덜거리는 특이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무언가를 정말 배웠다는 느낌이 들게 된 것은 같은 방을 쓰던 한 신부님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태도였다.
"하하 목사님은 정말 재밌어요. 전 목사님이 정말 좋아요."
온몸으로 규율에 반항하는 투덜쟁이에게 좋다고 말했던 그는 이후에 고된 행군을 같이 걸으면서 자신은 사실 충분히 앞서서 먼저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옆에서 같이 걸으며 몰래 숨겨온 간식을 나눠주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산다는 것, 모두가 가는 방향에서 홀로 거슬러 간다는 것은, 이럴 때에 이런 의미가 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지런하게 빨리 앞질러가서 목표를 끝내야 하는게 정답이고 원칙이라고 겁박당하는 공간 속에서, 앞을 쳐다보는게 아니라 옆을 쳐다보는 사람이 되는 것,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미친듯이 질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짓는 사람이 되는, 그것이 바로 "신성한 게으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 같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반대로 가는 사람, 가다가 멈춰설 수 있는 사람, 달리다가 속도를 줄일 수 있는 사람, 목적지가 아니라 주위의 풍경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사람, 부지런해야만 한다고 하는 세상 속에서 게을러도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사람. 아니 오히려 가끔, 시간이 날 때마다, 생각이 날 때마다, 최선을 다해 게을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용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