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딸이 믿음직스럽습니다"
올해는 추석 날이 아들 생일과 겹쳤습니다. 아들에게 생일날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물었더니 소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더군요. 명절 당일 문을 여는 고깃집이 없는 관계로 부랴부랴 글램핑장을 예약했습니다.
아침 일찍 납골당에서 공동 차례를 지내고 오후에 글램핑장으로 향했습니다. 고기를 열심히 구워 다섯 식구(반려견 동반) 배가 빵빵해질 만큼 잘 먹었습니다. 마지막에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아들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퇴실 시간이 다가오자 딸아이는 집에 들렀다가 스터디 카페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중간고사가 코 앞으로 다가왔거든요. 딸아이는 연휴에 스카에 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했나 봅니다. 선행을 미리 좀 해놨으면 고생을 좀 덜했을 거라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딸은 동생에게도 한마디를 건넸습니다.
"너는 운 좋은 줄 알아! 나는 제대로 된 학원 안 다녀서 힘들어."
"나도 누나랑 똑같은 학원 다녔거든."
"너는 초등학생 때고 나는 중3 때까지 다녔잖아. 나도 큰 학원에 다녔어야 했는데..."
딸아이는 중3 때까지 아파트 단지에 있는 아주 작은 학원에 다녔습니다. 시험 성적이 잘 나와 괜찮은 줄 알았는데, 초등학생 비중이 높아 소수만 다니는 중학생들의 선행이나 심화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남매가 같은 학원에 다닙니다.
"그래도 잘 가르치지 않았어? 시험 잘 봤잖아."
"저 그만두고 저랑 같이 다니던 친구한테 선생님이 너의 앞날을 위해 학원을 옮기는 게 좋겠다고 했대요."
초등학교, 중학교 1,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수학을 시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평범한 학원에서는 중3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고등학교 선행을 시작합니다. 선행 중 가장 늦은 선행이라고 할 수 있죠. 딸아이는 이마저도 놓쳐 고등학교 입학 전 1월 말부터 선행을 시작했습니다.
"미리 공부를 시켜줬으면 좋았을 텐데. 미리 안 해두면 힘들다는 걸 알려줬어야죠!"
딸아이가 처음 이런 말을 했을 때는 '시켜도 안 했을 거면서?'라고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들으니 아쉬움과 미안함이 밀려들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2021년도 12월 크리스마스이브에 딸아이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거든요.
"○○이랑 □□는 벌써 고등학교 수학 배운대요.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지금은 피아노나 신나게 치고 태권도 열심히 배워 둬!"
○○이, □□는 딸내미 초등학교 절친이거든요. 중학교 1학년은 학교에서 시험도 보지 않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중2 수학까지는 선행을 마친 상태였죠. 아내와 저는 이렇게 빨리 고등학교 수학까지 안 해도 된다고 합의하고 말았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켜도 안 하겠지라는 양가감정이 일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딸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다른 학원에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중 3 겨울 방학 때 수학, 영어 학원을 옮겼습니다.
처음에는 엄청 헤맸죠. 고등학교 첫 중간고사 대비할 때 학원에서 42점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1학기 말 학교 수학 성적을 90점 이상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중간중간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도대체 수학을 왜 공부해야 하냐고 투정도 부렸습니다. 하지만 남몰래 학원에 2시간씩 일찍 가서 복습하며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많이 힘들어했지만, 열심히 따라가는 모습이 기특했습니다. (관련 글: 수학 선행 안 시켜서 망했다던 고딩 딸의 반전) 그런데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딸아이가 조금은 더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미안했습니다.
며칠 전 딸아이 방에 들어갔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더라고요.
"아빠, 집합이랑 명제 알아요?"
"중학교 1학년 때 배웠는데? 제일 쉬운 단원이잖아."
"요즘에는 고등학교에서 배워요. 안 쉬워요. 이 문제 풀어봐요."
"아빠는 교집합, 합집합, 차집합 밖에 몰라. 잘 자~ 파이팅!"
여전히 힘들다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자식 마음을 헤아리다 보니 지갑이며 카드며 수시로 잃어버리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빨리 기억에서 지워버려야죠. (관련 글: 온갖 걸 다 잃어버리는 딸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애들은 똑같은 진도를 두세 번씩 빼는데, 저는 다 처음이라 진도 따라가기도 바빠요. 심화를 할 수가 없어요."
최근 딸아이가 수학 심화를 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과외를 해볼까?', '학원 선생님한테 학원에서 더할 수 있는지 상담해 볼까?' 급관심을 보였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몇 주가 흘렀습니다.
글램핑장에서 고기를 뜯으며 딸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들으며 수학을 더 하고 싶다던 딸아이 말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또다시 후회할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공부를 하겠다는데, 팍팍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나태하다니! 수학 학원 선생님에게 상담 전화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딸아이가 중학교 때부터 선행을 했다면 지금보다 수학을 훨씬 잘했을까요. 고등학생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을까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선행을 하지 않아 더 열심히 공부한 덕을 봤을지도 모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 가족의 정신 건강을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결론지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