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달리 되었더라면
[오늘 수필 #6_풋사랑]
누구나 연필을 처음 손에 쥐게 되는 때가 있다. 분명히 배웠고 수도 없이 지적받았지만, 이제는 누가 가르쳐줬는지도 가물가물 기억이 안 나는 연필을 올바르게 쥐는 법. 너무 꽉 쥐는 것도, 너무 약하게 쥐는 것도 정답이 아닌 적당하게 쥐는 법. 글씨를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또렷하고 예쁜 글씨를 쓰는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었을 텐데 어느새 부터인가 잊어버렸다. 잊고 싶어 잊은 건 아닌데 지금처럼 쥐고 쓰는 게 편하다. 쥐는 법도 못났고 옮겨 적는 글씨들은 사뭇 더 못났다. 하지만 어쩌겠나. 또박또박 예쁘게 쓰는 사람들의 쥐는 법을 따라 하면 뱁새가 황새 쫓아가듯 더 힘이 들고 어색하기 마련이니. 예나 지금이나 크게 발전한 게 없는 걸 보면, 지금으로부터 십 년 뒤나 이십 년 뒤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겠다.
그런데 하나 달라진 게 있다. 지우개를 쓰는 법. 얼굴에 철판을 깔았는지, 글씨가 못나면 못난 대로 남에게 마구 들이밀었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지금은 남에게 보일 글씨라 하면 자꾸 지우고 고치게 된다. 굳이 이상하다 하면 이상한 건, 그 글씨를 볼 사람이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면 더더욱 지우고 고치게 된다. 마치 예뻐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선 유난히 내가 내 외모에 엄격하고 자꾸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우고 새로 고쳐 쓰는 글씨도 내 것이지만, 그 글씨 주변엔 흔적이 남는다. 희미하지만 한 번 이상은 지워졌었다는 못난 글씨의 흔적. 가끔은 감추고 싶어 지우개를 힘주어 쥐고 박박 문질러보지만 영영 안 지워지기도 하는 그 흔적. 많이 남기면 남길수록 훈장처럼 자랑스레 떠들어 재낄 수도 없는 노릇. 부끄럽고 못났지만 글은 계속 쓴다. 사실 글씨가 예쁘다고 좋아해주는 사람보다는, 좀 못나게 썼어도 속에 담긴 내용과 진심이 잘나고 멋있다 해주는 사람이 편하고 좋다. 독자 마음대로 쉼표와 마침표를 찍어, 섣불리 책을 덮는 사람보다는. 어디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며, 글쓴이가 찍은 마침표까지 정성스레 읽어내려 가주는 사람. 내가 ‘나‘다울 수 있게 해 주고 그런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잘 보이려 어색하게 쓴 가면을 편하게 벗기고 웃어줄 수 있는 사람.
처음 겪은 풋사랑. 나이만 가벼웠지 가면은 가장 무거웠을 때다. 글씨를 수도 없이 고쳐 쓰다가 정작 진정 하고 싶었던 중요한 말은 보여주지도 못했다. 그래서일까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때의 설익었던 생각과 감정들이 이제 와서 온전히 조리되는 것도 아닌데, 무언가 끝맺지 못했다는 사실이 괜히 마음 한구석에 선명하게 자리 잡는다. 분명히 영원히 감추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그때의 나인데, 막장드라마의 작가처럼 바보 같은 상상도 해본다.
‘그때 달리 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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