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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Mar 21. 2018

수덕사 암각화에 얽힌 이야기

수덕여관과 이응로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많다. 그중 한 분이 이응로 화백(1904-1989)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의 화풍이나 예술에 대한 이해는 전문가분들이 해주실 거라 믿고 우리는 그냥 그분의 삶을 잠시 엿보도록 하자.


부유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그림을 그리겠다고 호기를 부리던 사내, 청년 이응로는 21살이 되자 집안 중매로 고운 처녀를 맞아 장가를 든다. 젊은 나이에 미술을 하겠다고 설쳐대던 사내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하고 일본에서 돌아와 대학교수가 된다. 그런데 예술가 기질을 타고나면 그런 건지 21살이나 어린 제자와 염분이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인지 세상 물정도 잘 모르던 부부는 부부의 연도 제대로 쌓지 못하고 헤어지고 만다. 이응로 선생이 그림 공부를 하겠다고 파리로 제자와 함께 야반도주하다시피 떠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응로 선생이 파리로 떠나게 된 데에는 사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파리 유학까지 다녀온 나혜석(1896-1946)이 사랑에 실패하고 중이 되려고 친구인 김일엽 스님이 있는 수덕사를 찾는다. 하지만 수덕사 고승 만덕 스님은 “중이 될 재목이 아니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하는 수 없이 나혜석은 수덕사에 입적을 하지 못하자 인근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5년간이나 머물며 시름을 잊으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며 세월을 보낸다.


이때 이응로 선생이 소문을 듣고 나혜석이 머물고 있는 수덕여관을 찾아와 만나게 되고 그녀 덕분에 미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 이응로는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서예와 묵화를 배우며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이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셈이다.


나혜석은 이응로에게 파리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고 5년이 지난 어느 날 수덕여관을 떠나간다. 누님처럼 선생님처럼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 선생은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버린다. 그리고 수덕여관을 부인 박귀희 여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곳에서 수덕사 주변의 풍광을 화폭에 담는 일에 열중한다. 그러나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 선생은 참지 못하고 드디어 1958년 파리로 간 것이다.


파리로 떠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부인 박귀희 여사는 수덕여관을 운영하며 이제나 저제나 떠나간 남편이 돌아오길 학수고대한다. 그러나 이응로 선생은 혼자서 파리를 간 게 아니라 그가 가르치던 제자이자 연인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갔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귀희 여사는 수덕여관에서 마냥 남편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낸다.


수덕사 입구를 조금 지나면 바로 수덕여관이 나온다.
수덕여관 주변에 이응로 선생의 암각화가 있다. "이응로 그림"이라는 표식도 새겨 넣었다.
가운데가 수덕여관 내 이잉로선생이 머물며 그림작업하던 방



그렇게 10여 년 세월이 지난다. 그리고 1968년 동백림 사건이 터진다. 이응로 선생은 한국으로 압송되어 오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다행히 2년 반이 지나자 이응로 선생은 특사로 풀려나게 되고 박귀희 여사를 다시 만나게 된다. 수덕사 석탑을 돌며 매일같이 이응로 선생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기도를 올린 게 효험이 있었던 건지 그렇게 둘은 재회를 한다.


그 후 이응로 선생은 수덕여관에서 두 달 정도 몸조리를 할 겸 머무른다. 이응로 선생과 박귀희 여사와의 재회,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순간이었을 것 같다. 실로 감격적인 상봉을 하게 되었으니 그 기분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알듯모를 듯, 어쩌면 서로가 나이를 먹은 후 또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오히려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그래서인지 이때 이응로 선생은 여관 뒤뜰에 놓여있는 마당바위에 ‘문자추상’ 작품을 새긴다. 마치 박귀희 여사에게 그동안의 미안함을 사죄라도 할 요량으로 말이다. 하지만 너무 큰 징표는 오히려 전 부인 박귀희 여사에게 또다시 피멍처럼 고통으로 남는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징표로 바위에 새긴 문자추상이니 그걸 볼 때마다 다시 떠나가 버린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얼마나 컸을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


두어 달 그렇게 애틋한 사랑놀음을 하다 이응로 선생은 자신의 자취를 작품으로 남겨 놓은 채 또다시 훌쩍 파리로 떠나가 버린다. 도대체 문자추상이 무어란 말인가. 박귀희 여사는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구순을 앞둔 세월까지 여전히 남편을 기다린다. 죽기 전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보지만 이응로 선생은 1992년 귀국 전시를 앞두고 끝내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박귀희 여사는 그동안 이응로 선생이 파리에서 편지를 보내 이혼을 요구하자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 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못내 후회스럽고 아쉽기만 했다고 했다. 그래도 남편 출세길에 지장이 될까 봐 모든 걸 선생이 하자는 대로 다해주었으니 법적으로는 부부가 아니니 뭐라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이제 그녀는 선생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분명 남남이지 않은가 말이다. 더구나 파리에는 이응로 선생의 두 번째 부인 박인경 여사가 버젓이 살아계시지 않은가.


그녀가 기거하던 수덕여관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이응로 선생이 남겨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 오리 그림이 걸려 있을 뿐이다. 박귀희 여사는 그림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오리 모습이 꼭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던 2001년 초 어느 날 수덕여관 주인 박귀희 여사는 9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전 부인의 마음 한편에 동심초가 피어나고 다시 또 지고, 그러기를 십수 년 한없이 반복하다 두 분은 끝내 하늘나라에 가서야 조우를 하게 된 것이다.


수덕사 입구에 수덕사 미술관이 있다.
미술관에 전시된 이응로 선생 작품들 중에서
수덕사 가까운 곳에 이응로 선생 생가가  있다.  전시관과 자료실을 증설해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 수덕여관은 박귀희 여사가 2001년까지 식당을 겸한 여관으로 운영했으나, 그녀가 세상을 뜨자 수덕사가 인수해 식객은 받지 않고 지금은 기념관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 경기도 이천에는 이응로 화백의 장손 이광세 선생이 도자기기를 굽고 있다. 그가 일하는 가마터에서 이응로 선생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선생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도자기에 새겨 작품으로 빚어내고 있다. 한으로 남은 혈육에 대한 그리움은 이응로 화백이 보내준 서신들과 못다 한 전 부인에 대한 사랑까지 더해져 도자기는 어느새 또 다른 문자추상처럼 살아난다.


대전에 이응로 미술관이 있다.  이응로 선생 작품 대부분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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