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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anist Garam Cho Mar 17. 2020

트로피를 거머 쥔 탈락자

[Pianist 조가람의 Classic Essay]

[피아니스트 Ivo Pogorelich]



 1980년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피아노 국제 콩쿠르 현장이 뜨거웠다. 고개도 잘 가누지 못할 것 같은 가녀리고 잘 생긴 청년이 걸어 나와 쑥스럽게 인사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불현 돌변하여 바위를 집어던지는 듯한 거침없는 타건과 꽃잎을 보듬는 여신 같은 부드러움 사이를 넘나 든다.

일찍이 경험한 바 없는 과감한 질감의 쇼팽.

손을 건반으로 던지면 틀린 음들조차도 빛의 반향처럼, 빗나가 맞은 소리들이 파편으로 사방으로 튀고, 희한하게도 썩 멋진 자연과 닮은 울림이 인다.

‘Notes ignore’라고 표적이 될 법한 그의 박자, 그가 느끼고 만들어내는 박자 사이에는 바람이 불 것만 같다.


3차원을 넘어서 5차원쯤 되는 곳의 음과 음 사이를 유영하는 기분이 든다. 올림픽과 썩 닮은 음악 경연 현장이라는 사실은 일찌감치 잊었다.





  예술에 맞고 틀림이 있겠냐마는, 콩쿠르의 세계에는 이 존재한다. 표준적 시각에서 봤을 때 호불호가 매우 갈릴 수 있는, 정격 연주의 반대 지점에 서있는 듯 보이는 파격적인 그의 해석에 1980년 바르샤바는 시끄러웠다. ‘전통’이라 불리는 ‘익숙한 패턴’의 해석이 아니었기에, 수호할 전통과 권위가 많아서였을지, 이보 포고렐리치의 1차 예선 통과 결과에 분개한 심사위원 루이즈 켄트너는 심사위원직을 사임했고, 그의 개성을 스타성을 의도한 연출로 치부한 몇 심사위원들은 아예 낙제점을 주었다.

그는 결선에 통과하지 못했다.

그의 탈락에 심사위원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그는 천재입니다. 미안합니다. 이 콩쿠르에 함께하게 된 것은 큰 영광이고 모든 심사위원분들을 존경하지만이 심사위원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부끄럽네요.’

라는 말을 남기고 심사위원들의 몰이해에 격분하여 심사위원직을 사퇴한다.



https://youtu.be/aAFb9YkjK0g

1980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당시 현장 영상


 그의 콩쿠르 당시 실황 연주는 온라인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익히 알고 있는 곡의 해석의 예상치를 뒤엎을 때가 많은 그의 연주를 들으면 누군가는 신경이 굉장히 거슬릴지도, 누군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고마워요’하며 바보처럼 울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후자였다.

  비슷한 음원이 세상에 끝없이 복제되고, 모방하고, 학습하여 재현되고, 누군가의 과거를 복원하며 채점받는 이 클래식 음악세계가 여전히 확장될 수 있음을 열어주었다. 오래된 낡음에 깃든 창조성의 산 증거였기에.


그렇게 열린 새 지평은 썩 아름다웠고,

익숙함이 새로운 즐거움으로 향유할 수 있다는 경험을 선사받았고,

고로 이미 수도 없이 많은 명반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주되어야  클래식 음악의 존재의 당위성을 확인받았기에 클래식 음악가로서 가슴이 벅찼다.


포고렐리치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당시, 우승자 결정 전, 탈락자를 소집한 기자 회견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태우고, 껌을 씹으며

‘결과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다만, 새로운 차원의 쇼팽 음악 해석을 알리고 싶었다’

고 응한다.





1980년 개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탈락자 기자회견에서 담배를 입에 문 포고렐리치



 그 현장을 목도했을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사퇴,

 르샤바 음악원 학생들이

 ‘그는 진정한 우리의 우승자’라며 직접 제작하여 수여한 트로피,

 당시 1위 수상자였던 당 타이손이 아닌, 탈락자와 유례없이 계약을 맺은 도이치 그라마폰.


이는 아마도 클래식 음악의 생동에 대한 갈채였을 것이다.


‘콩쿠르’로 점철되어 ‘전통’이라는 명목의 획일화된 주류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진정한 예술로서 영위되길 바라는 응원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겁 없이 예술가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길을 떠나는 젊은 예술가에 대한 예우였으리라.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외면당했지만, 여러 예술가들의 혁명을 대속해주는 그를 사랑하는 청중, 음악 관계자들의 수호와 애정 속에 그는,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건반 위의 이단아’라 불리는 이보 포고렐리치는 운명적으로 신으로부터 점지되어 모든 깨달음을 얻고 태어난 듯 보이지만, 그에게도 뮤즈가 있었다. 그의 스승이자 아내였던 알리자 케제라제.


“사람들이 나를 천재로 보지만, 나는 그 과장된 칭찬에 괴로웠다. 나는 알리자 케제라제보다 더 나은 피아니스트를 알지 못한다. “
"알리자만큼 나의 음악 세계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이보 포고렐리치
 

 

이보 포고렐리치와 그의 스승이자, 아내 알리자 케제라제



1976년부터 1996년까지 20년간 그들이 나누었던 음악적 결합은 매우 친밀하여, 그녀는 그의 음악적 나침반이자 후에는 그 둘은 서로를 하나의 영혼처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21살 연상이었고, 그의 음악적 지주이자 동기였던 그녀를 죽음으로 잃자, 평소 앓고 있던 그의 우울증 증세가 악화되어 그는 스위스 루가노에서의 고립을 자처한다.

포고렐리치가 음악가로서 느꼈을 상실감과, 홀로 일구어 갈 새 음악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매우 무거운 것이었겠지만, 먼저 떠나 간 반쪽 영혼의 후략의 말에 대한 책임이었을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온전한 자신만의 것을 다시금 구축해나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을지,


 그는 털어내고 세상으로 다시 나온다.


https://youtu.be/OUx86u30ACY



[좌의 옷을 입은 우로의 혁명]


 인터넷도 티브이도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나타난 그의 음악은 한층, 매우, 격하게, 느리고 넓은 혁명적 박자를 갖게 되었다.

혹자는 이 혁명을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하지만, 그의 여러 인터뷰를 살펴보면,

이러한 개혁성은 작곡가와 악보를 향한 반기가 아니며 오히려 참된 본질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좌의 옷을 입은 우로의 혁명이다.
 

‘제트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의 시간을 생각해야 합니다. 작곡가들이 작곡했을 당시로 돌아가서 속도를 생각해야 해요. 그들의 시간은 아마도 이 시대보다 훨씬 더 느렸을지도 모릅니다’.
-이보 포고렐리치
 

[우리가 때로 느리게 갈 이유]


 2015년, 베를린에서 본 그의 실황 연주를 잊지 못한다. 평균 연주 길이 30분의 리스트의 소나타를 무려 한 시간에 육박하는 템포로 연주하고,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 역시 두 배가량 길었으며,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는 개성에 두 팔 활짝 벌린 필자의 머릿속을 ‘왜’로 가득 채웠을 만큼 충격적이었을 정도의 느린 템포. 청중들의 모든 의문 위에 던져지다시피 주어 진 것은 '사유의 공간'. 이 바쁜 시대에 아마도 현대인의 상상 그 너머에 존재할 그 '공간'은,  가히 인간이 홀로 무한히 거닐 수 있는 유일한 본질로 돌아가는 혁명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후 위에 언급된 그의 인터뷰를 읽고 다시금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다음은 필자가 손꼽는 명연주 중 하나.

왜 우리에게는 공간이 필요한가,

왜 우리는 때로 에둘러 천천히 거닐 필요가 있는가,

우리가 놓치고 있던, 들여다보아야 했을 울림은 얼마나 있는가,

질문과 답을 준다.

https://youtu.be/PPaJyfDP7JQ

모든 고정된 관념에 돌을 던져 언 강물을 깨우는 그와 같은 연주자의 과감한 통찰력이 있기에 클래식 음악계는 고여 썩지 않고 여전히 살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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