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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융한삶 May 25. 2024

유서






한 번도 신을 믿지 않았다.

태양이 더 이상 뜨거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럼 차라리 비를 좋아하기로 결심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적은 없었다. 별로 내려놓을 것도 없었고.

별이 하나쯤은 내 것이기를 바랬었는데. 그저 전갈의 별자리를 반성했을 뿐이었다.



한 번도 날아본 적은 없었다. 날파리나 잠자리의 날개를 동경하기도 했었다.

무지개를 껴안고 구름을 떠먹고 싶었는데. 

그저 벚꽃을 태우는 상상이나 할 뿐이었다.



후회가 남는다. 아니 남지 않는다. 

후회 없이 살고 싶었으므로, 후회는 남지 않아야 한다.



집착은 접어야 한다. 욕심은 버려야 한다.

병신같이, 미련은 없어야 한다.



나는 내가 만든 감옥의 빌어먹을 교도관이었다.



존재하지 않음은 두렵지 않았다. 그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니까.

존재하게 되지 않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존재 하나마나하게 존재하는 것.

그것이었다.



다시 살면 어떻게 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건 출사표가 아니니까. 

그저 삶의 끝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아름다움이 되었을까를 생각해볼 뿐이다.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버려지는 것이었고,

지금은 그 시간들이 꽤나, 아깝다고 생각한다.



이제야 방향을 잡은 것 같은데. 안타깝다. 허무하기도 하고.

왜 세상을 살게 되었을까도, 궁금하기도 하다.



잊어도 되고, 잊지 않아도 된다. 다만, 

보고 싶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내 목소리나 내 글씨들이,

누군가 안고 싶어지면 좋겠다.



그러면 너의 우산에, 

내 빗소리를 담아서, 

나도 보고 싶다고, 

써, 내릴텐데.



20일에 내리는 비가 되고 싶다. 

울어줄 사람이 혹시 있다면.

미안하고.

고맙다.




유서, 조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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