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0년 전 ‘박치기 왕’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와 드라마 ‘여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를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 시절 우리는 흑백 TV를 통해 드라마와 스포츠, 뉴스를 보며 정보와 즐거움, 슬픔을 함께 할 수 있었다. TV가 나오기 전 라디오와 신문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라디오, TV, 신문 등은 소통을 향한 시대적 흐름으로서 인간의 욕구에 따라 발전되고 변화했다. 인쇄술로 인한 활자의 시대에서 라디오와 TV의 전파 미디어 시대로, 그 후에는 인터넷, 정보 통신의 미디어 시대로 그리고 이제는 1인 미디어(MCN), 소셜 미디어(SNS), 유튜브(Y-TUBE). 가상의 세계 메타버스(METABUS)로 이어지고 있다.
캐나다의 문명 비평가였던 맥루한(M. Mcluhan, 1911~1980)은 일찍이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신체의 확장이요, 중추 신경 및 감각 기관의 확장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미디어 말고도 도로, 의복, 가옥, 화폐, 시계, 바퀴, 자전거, 비행기 등 모든 것을 ‘미디어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미디어로 인해 지구는 하나의 촌락처럼 가까워졌다고 진단하였다.
요약하자면, 미디어는 소통의 수단일 뿐 아니라 예술적 표현의 수단이며 감각 기관의 확장이다.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도구와 환경, 즉 관계를 만드는 매개체 모든 것이 미디어가 될 수 있다.
나는 현재의 우리에게는 미디어의 방대한 이론보다도, 소통의 도구로써 미디어를 이해하는 것과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미디어를 이해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영어 ‘미디어’(media)는 라틴어 ‘메디아’에서 온 말이다. 메디아는 ‘수단, 방법’을 가리킨다. ‘대중, 다수’를 가리키는 ‘매스’(mass)와 결합된 ‘매스-미디어’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을 가리킨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매스 미디어’ 또는 ‘미디어’는 근대 또는 현대적인 용어로 보이지만, 그것의 기본 개념은 고대와 성경의 내용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과 소통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신(神)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질적(質的) 차이’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 나타나심 )에 직면한 인간은 죽게 된다는 사실이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창세기 32:33; 출애굽기 33:20; 사사기 13:22 등).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안전하게 소통하시기 위한 ‘수단’(라, 메디아)을 사용하신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그러한 수단으로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현현(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심. 창세기 18장), 환상 또는 이상, 음성, 꿈, 사람(주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심), 기록된 말씀’ 등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수단들’은 오늘날의 ‘미디어’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시각적인 부분, 청각적인 부분, 그리고 문자적인 부분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미디어 사용의 원조’라고 할 수 있으며(물론 하나님의 미디어 사용은 대중을 상대로 하기보다는 ‘주로’ 개인을 상대로 하기는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성경에서 미디어에 해당하는 요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 미디어’는 미디어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을 펼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기독교 미디어의 사명은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무분별한 SNS의 영상들과 영적으로 좋지 않은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사람을 살리고 회복하는 것이다. 설교만이 유일한 복음 전파의 수단이 아니라 미디어 역시 하나님의 목적 실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는 ‘미디어’라는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꽤 많다. 기독교 신학, 특히, 조직신학을 다룰 때 제일 처음 다루는 주제가 ‘신학 서론’인데, 신학 서론은 ‘종교’와 ‘신학’을 다루면서 ‘신학의 불가능성’이라는 주제도 다루게 된다. 애초에 신(神)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인간이 자율적으로 신을 찾아내어 학문의 대상으로 삼아 논(論)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신이 존재하고 인간이 임의로 신에 대한 내용을 알아차리고 논할 수 있다면,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얼마든지 손쉽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학의 불가능성’이라는 주제와 함께 ‘계시 종교’라는 주제를 다룬다. 신 쪽에서 먼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지’(=계시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신에 대하여 알 수 없다. 이 부분에서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인 반면 기독교만은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종교, 즉 ‘계시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하나님에 대해 논의할(=신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과의 소통을 원하셔서 취하시는 행동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계시를 위하여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하신다. 그것이 앞에서 제시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쉐키나 현현, 간접적인 현현, 환상/이상, 꿈, 음성,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을 통한 계시, 기록된 말씀을 통한 계시’ 등인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2 상반 절에서 “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말은 바로 앞에서 소개한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다양한 계시 방법들과 수단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이야말로 하나님의 계시의 최종적인 형태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인간과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다양한 수단과 방법, 미디어를 활용하여 가능한 한 다수의 대상들과 접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의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