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이불 03화

잣나무와 칡넝쿨

내가 살고자 너를 죽이니 나도 죽었다

by 시골뜨기

올봄 (동산바치)


해토머리에 봄의 요정들은 깡충거리며 땅거죽을 밟고 다닌다. 땅은 굼벵이처럼 느리게 꿈틀거리며 슬그머니 기지개를 켠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자 잠자던 씨앗들이 부스스 눈을 떴다.

잠꾸러기 씨앗들이 미적거리자 해는 꼬챙이 햇살로 땅을 쑤셔대며 눈을 뜨라고 부추긴다. 그 꼬드김에 못 이겨 눈 뜬 싹은 부신 햇살에 환한 웃음 지으며 잎을 선보인다. 거무튀튀한 땅거죽에 어린순이 삐죽삐죽 돋아나고 물오른 나무마다 미어진 움들이 앙증맞게 눈을 뜬다. 바야흐로 생명의 계절 봄이다.


그 기나긴 겨울, 이런 봄날이 오길 꿈꿔왔지만 꿈이 이뤄질지는 장담하지 못했었다. 꽁꽁 얼어붙은 땅속에서 생명을 간직한 여러해살이 식물들은 오들오들 떨면서 작은 온기로는 생명의 눈을 데우고 있었다. 씨눈은 제 몸이 조금씩 사그라지더라도 봄날까지만 버티자고, 봄이 오면 눈 트고 싹 나서 잎을 펼치면 다시 기운 차릴 수 있다고 다짐하며 긴 겨울밤을 보냈다.

봄은 생명을 주고받는 계절, 한살이가 가고 한살이가 온다.


새로 시작하는 한살이들. 그들은 지난 세대가 물려준 양분으로 재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여리지만 당찬 어린싹과 어린 뿌리를 냈다. 숲에 은은한 초록 향이 번진다. 땅은 땅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초록 기운을 뿜어댄다. 삶의 벅찬 기운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야말로 숲은 생명 기운으로 미어터진다.


하지만 봄은 죽음을 확인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겨울에는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아 죽음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봄에는 뭇 나무들이 연둣빛 옷으로 매무시할 때 죽은 나무는 칙칙한 몰골로 오도카니 서 있어 죽음을 감출 수가 없다. 숨 멎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좁쌀보다 작은 씨도 앙증맞은 싹을 틔우는데 그 당당한 잣나무는 아무 꿈쩍이 없다. 죽은 것이다. 겨우 붙잡고 있던, 아니 겨우 매달려 있던 바늘잎마저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뜨리는 그 꼴을 더는 볼 수가 없어 결국 잣나무를 베어냈다.


누구를 탓하랴! 죽어버린 잣나무를 나무랄까, 살아있는 칡넝쿨을 나무랄까! 날 탓해야지. 동산바치로서 나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나를 나무라야지.


칡넝쿨이 오래전부터 잣나무를 옥죄고 있었으나 건성으로 지나쳤다. 죽어버린 잣나무와 칡넝쿨을 톱질로 베어내는 나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은 농부다.




지난여름 (칡넝쿨)


누군가는 나더러 ‘악바리’라고 했다. 산다는 것이 이런 게 아닐까? 때론 땅을 기고 나무에도 오르며 어떡해서든 아득바득 살아야 한다. 고분고분하게만 살다가는 제 것 다 뺏기고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그건 바르지 못한 삶이다. 난 옹골진 삶을 꾸리고 싶다. 봄이 되면 잽싸게 잎과 줄기를 내어 햇볕을 모아 양분을 만들었다. 여름내 만든 양분은 겨우내 버틸 식량이 된다.


나는 나만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콩과식물이다. 콩과식물은 뿌리혹박테리아와 공생하며 공중의 질소를 땅으로 끌어들이어 흙을 거름지게 한다. 그러므로 내 주변의 푸새들은 내 덕에 질소를 거저 얻는 것이다.

내 잎은 가축의 좋은 먹잇감이다. 내 꽃은 술독을 빼는데 쓰이고 하혈을 치료하는 데에도 쓰인다. 뿌리는 녹말을 만들고 갈근탕을 만드는 약제로도 사용된다. 감기로 인해 오한이 나거나 어깨와 목이 굳어질 때에 발한 해열제로 갈근탕을 달여 먹으면 효과적이다. 또한 감기에 걸려 토하거나 설사를 할 때도 달여 먹으면 좋고, 패인 상처의 지혈에도 효과 있다. 내 줄기를 가지고 물건을 매거나 목공 기구를 만든다. 내 속껍질을 가늘게 쪼개어 섬유도 만들고, 그 섬유로 갈포를 만들기도 한다. 옷감에 물들이는 사람들은 내 즙을 가지고 천연물감도 만든다. 나는 이처럼 가치 있는 식물이다.


이 여름은 내겐 한창 때다. 이때에 난 잎을 펼쳐 햇볕과 공기를 모아야 한다. 이는 내일을 위한 대비다. 멧돼지가 뚱딴지를 찾기 위해 흙을 후비듯이 난 햇살을 받고자 바닥을 훑으며 기었다. 우리는 뭐라도 손에 잡히면 붙잡고 기어올라야 했다. 여의치 않을 경우엔 우리끼리 서로가 엉기어 위로 올라갔다. 이것은 삶을 이어가려는 우리의 깜냥인 것이다.


내 생에 여름만 계속된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바둥거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름은 금방 지나가고 여름 후엔 서리 내리는 가을과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이 온다. 잎 떨구고 가느다란 줄기로만 겨울나기를 했다. 내가 기어오른 잣나무를 꼭 붙안고 겨울을 났다.


잣나무는 그 세찬 눈보라에도 꿋꿋하게 버텼다. 나는 잎사귀를 다 잃어버렸는데 잣나무는 바늘잎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푸른 모습으로 겨울나기를 하였다. 사철 내내 푸름을 간직한 잣나무가 부러웠다.


춥고 긴 겨울 동안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지난여름에 한눈팔지 않고 햇볕을 받아 양분을 뿌리에 갈무리한 덕이다. 이렇게 난 올봄을 맞아했고 또다시 여름이 되었다. 이 여름에 또 열심히 잎을 펼쳐서 바지런히 양분을 모으려고 한다. 내 뿌리를 충분히 살찌워야 한다. 내 뿌리가 살찔수록 삶이 안정되고 자손의 미래도 기약할 수 있다. 우리 삶은 릴레이 경기 선수처럼 바통을 받아넘기며 이어진다. 봄에 눈을 틔워 잎을 내었고, 여름에 꽃을 피우고 뿌리를 살찌웠다. 겨울엔 죽은 척하는 것이 오히려 사는 법이다.


난 혼자서는 설 수 없다. 누군가를 의지해야만 설 수 있는 덩굴식물이다. 내가 아무리 넓은 잎사귀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다른 잎들이 가린다면 난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내 잎이 그늘지면 광합성 수치가 보상점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러면 광합성량보다 호흡량이 더 많아져서 오히려 양분을 잃게 된다. 이러다가는 내 후손은커녕 내 삶조차도 기약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행히 내게는 뭐든 감을 수 있는 줄기가 있어 나무를 타고 오른다.


마침 곁에 잣나무가 있기에 기어올랐다. 잣나무는 여남은 살이라 제법 컸다. 내 연한 줄기는 나무를 안정적으로 감은 후에는 점점 굵어지며 굳어졌다. 이것이 잣나무에게 조금은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살기 위해 잣나무를 옥죄어야만 했다.


가을이 되면 내 잎사귀는 시든다. 그러나 잣나무는 한겨울에도 그 푸름을 간직하며 살아남지 않던가? 내가 이 여름에 햇볕을 조금 가리며 잣나무를 감았다고 해서 그에게 큰 피해는 없을 것이다. 난 약한 덩굴이고 그는 강한 나무다.


난 쑥쑥 자라서 나무 높이만큼 자랐다. 갈래 진 넓은잎을 펼쳐서 햇볕을 모았다. 높은 곳에서 받는 햇살은 더 곱고 깨끗했다. 잣나무 잎과 칡넝쿨 잎이 얼기설기 얽힌 모양이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옆에서 자라던 다른 칡들도 잣나무를 기어올랐다.


그끄러께 잣나무를 감고 올랐으며, 그러께 줄기의 눈마다 잎을 내어 잣나무를 덮어버렸다. 줄기도 제법 굳어지면 단단해졌다. 멀리서 보면 잣잎은 보이지 않고 칡잎만 보여 커다란 칡나무처럼 보일 것이다. 햇살은 온통 우리 차지다. 더 많은 줄기를 내어 잣나무를 칭칭 동여맸다.


동산바치는 왜 우리를 눈엣가시처럼 여길까? 그는 숲의 질서를 모르는가 보다. 동물의 세계뿐만 아니라 식물 세계에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있다. 어떤 생물종이 번성하다가 사라지는 것이 천이이며, 막바지에는 가장 뛰어난 종이 우점종 되는 극상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우리 칡은 극상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게 자연의 질서이니 더 이상 동산바치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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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 (잣나무)


가을이 되자 숲은 들썩거렸다. 높은 하늘은 더욱 파래지고 솜구름은 얼음처럼 시려 보인다. 햇볕은 얼마나 까칠한지 모른다. 굳게 닫힌 꼬투리들을 까발리고 도도하게 굳은 과일을 나긋나긋 무르게 만들었다. 시퍼렇게 뻐기던 나뭇잎들도 저마다 홍조를 띠며 울긋불긋해졌다.


가을 숲은 잔치마당인 양 사람들로 붐볐다. 밤을 줍고 버섯 따고 단풍 구경하는 사람들. 덩달아 다람쥐와 청설모도 도토리를 모으느라 바빠졌다. 숲은 이렇게 흥겨운데 난 버겁게 숨을 헐떡이고 있다.

해가 짧아지고 날이 추워지면 넓은잎나무들은 가랑잎을 스스로 떨군다. 넓은잎나무는 잎자루 부분에 떨켜 막을 만들어서 잎으로 가는 양분을 막아버리는데, 그러면 넓은잎은 맥없이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나 같은 바늘잎나무는 굳이 잎을 뗄 필요가 없다.


바늘잎은 좁고 가늘기 때문에 겨울에도 수분이나 열을 덜 빼앗기고 몸에 흐르는 수액은 진하기 때문에 웬만한 추위에도 어는 일이 없다. 잎이 좁기 때문에 양분을 넓은잎나무만큼 왕창 만들지는 못하지만 대신 사철 내내 꾸준히 양분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내 바늘잎은 맥없이 떨어지고 있다. 잎이 미워서 떨쳐버리는 것이 아니다. 내 잎들을 붙안고 싶다. 하지만 난 그럴만한 기운이 없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


난 늘푸른나무이건만 갈잎나무처럼 잎이 노래지면서 하나 둘 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번 겨울은 그런대로 버틸지 모르겠지만 내년 봄이 되면 더욱 빨리 죽어갈 것이다. 봄이 되어도 깨어나지 못하면 그건 내게서 생명이 떠난 것이다. 나는 내년 봄을 기약할 수 있을까?


3년 전, 칡덩굴이 내게 부탁했다. 내가 하늘을 가려서 햇빛을 볼 수 없으니 나를 딛고 오를 수 있게 해 달라고. 난 안쓰러움 마음이 들어 나를 오르도록 했다. 칡은 고마워하며 넝쿨을 뻗쳐 날 부드럽게 감으며 올랐다. 용수철처럼 휘감아 돌며 내 줄기의 끄트머리까지 오른 칡은 흥겨워하며 잎을 펼쳤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얼마나 뿌듯한가? 우리는 서로 얼싸안으며 잘 살았다. 우리가 함께 한 첫해에는 골고루 햇볕을 쬘 수 있었다. 칡은 아직 자리를 완전히 잡지 못한 상태였다. 가을이 되어 칡잎은 주접 들고 겨우 줄기만이 내 몸에 매달렸는데 새 봄이 되자 줄기에서 새 줄기가 나면서 금세 자라더니 나를 덮어버렸다.


연약했던 줄기는 점점 굳어지며 단단히 날 옥죄었다. 칡잎이 온통 내 몸을 덮는 바람에 난 햇빛을 볼 수 없었다. 여름이 되자 칡은 더욱 무성해지고 나는 양분을 만들지 못해 시들해졌다. 칡넝쿨은 이런 내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살 찌우기에만 급급했다.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 칡잎이 떨어지자 겨우 햇빛을 쬘 수 있었지만, 여름 햇살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그럭저럭 겨울을 나고 봄이 되자 칡은 봇물 터지듯 잎을 내어 날 덮어버렸고 칡넝쿨을 내 몸을 더 조였다. 뱀에 감긴 채 눈만 끔벅거리는 개구리처럼 난 옴짝달싹 못하고 여름을 보내고 이제 가을이 되었다. 올 겨울을 무사히 넘을 수 있을까? 내년 봄에 다시 눈 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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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동산바치)


겨울 숲은 희아리처럼 희끗희끗하다. 눈 덮인 숲에서 어렴풋이 비치는 갈맷빛 바늘잎나무는 쑥버무리 같다. 모진 눈보라에도 짙푸름을 간직하는 잣나무는 겨울에 더욱 돋보인다. 여름날 생생하게 우쭐대던 넓은잎나무들은 겨울의 추위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내가 이곳에 왔을 때, 학장 관사 둘레에는 잣나무가 심겨 있었다. 관사 밖에 심긴 나무에는 아무래도 신경을 덜 썼다. 가끔 바닥의 넝쿨들을 제거해 줄 뿐이었다. 잣나무는 더디게 자라는데 칡은 부쩍부쩍 자랐다. 바쁜 여름에 관사 주변의 잣나무를 잘 돌보지 못했는데, 그 틈새로 칡넝쿨은 잣나무를 온통 덮어버렸다.


잣나무를 감고 오른 칡넝쿨을 낫으로 쳐내자 칡넝쿨은 힘없이 잘렸다. 가을이 되자 칡넝쿨 잎이 모두 지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 해 봄에 잣나무를 감싼 칡넝쿨은 얌체처럼 잽싸게 새 잎을 내더니 금세 잣나무를 감싸다. 칡넝쿨은 걷잡을 수 없는 산불처럼 잣나무 숲에 번졌다.


잣나무를 감싼 칡덩굴을 벗겨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칡 줄기에 감긴 잣나무 줄기는 깊게 죄인 흔적이 남았다. 마치 밧줄로 팔을 칭칭 감았다가 풀었을 때 나타나는 시꺼먼 자국 같다. 그걸 보니 뱀이 개구리를 옭아매어 질식시키는 장면이 떠올라 움찔했다. 잣나무는 저리도 아프면서 왜 진작 아픈 기색을 내지 않았던가?


하긴 활엽수는 몸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 증상이 나타나지만 침엽수는 아픈 증상이 겉으로 드러날 즈음이면 이미 치료할 길이 없을 정도로 심해진 상태다. 그래서 느티나무나 튤립나무는 병이 오면 잎사귀에 금방 증상이 나타나므로 재빨리 조치를 취할 수 있지만, 향나무나 소나무는 쉽게 증상이 드러나지 않아 치료하기가 힘들다.


봄이 되면 미련두지 말고 죽은 잣나무를 잘라내야겠다. 칡넝쿨도 마찬가지다. 칡은 뿌리 채 캐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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