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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마디 Sep 17. 2022

나의 원룸

사평 반

작년부터 여행할 때마다  드로잉을  권씩  오는데 막상 집에 돌아오면 그런 내가 그렇게 모순일 수가 없다.  공간은 모른척하면서 밖에 나돌아 니며 자잘한  까지도 놓칠세라  그려대다니. 언젠간 내가 사는 이곳도 기록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기어이 2년이 지나간다. 떠나기 전에 미루던 숙제를 했다.  짐을 끌어안고 살아준 살림살이들을 그렸다.


 집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삿짐을 싸다 싸다  자체가 짐이 되어버린 집이라고   있겠다. 그동안 숱하게 이사를 했어도 계절 옷쯤은 부모님 집에 두고 오곤 했는데, 2 전에 본가를 떠날 때는 초등학교 졸업사진 액자까지  들고 왔다.  집에 다시는   마음으로.



1. 옷장

원룸에 옷장이 하나뿐이라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철 지난 옷은 개서 압축팩에 넣고 제철 옷은 압축팩에서 꺼내고 하루 종일 빼고 채우기 테트리스를 했다. 옷뿐 아니라 그림, 등산, 캠핑, 수영 용품을 꽉꽉 눌러 담은 박스까지 넣어야 해서 정육면체는 빈 틈이 없었다.

이런 물건에 밀려서 원래도 없는 옷이 계절마다 솎아내느라 더욱 줄어갔다. 아프리카 배낭여행 전 파릇파릇한 20대 회사원일 때는 매일 정장 스타일로 입었다가, 여행에서 돌아와 관광안내사로 일할 때는 유니폼을 입어서 따로 오피스룩을 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대학원에서는 매일 작업실 의자에 앉아있으니까 편한 옷만 찾다 보니 점점 고무줄 바지, 반바지만 많아지고 신발 또한 운동화에서 샌들, 최종은 슬리퍼로 진화했다.

이번 여름 친구들과 만나서 보면, 다들 편하게 걸치고 온다지만 나만 유난히 나시티에 짧은 반바지 그리고 슬리퍼나 샌들을 신더라고. 사실 니플패치도 쓰기 시작했다. 서른이 넘었는데 착장이 너무 자유로운가? 푹푹 찌는 여름옷으로 몸을 조이고 싸매는 게 싫어서 점점 얇고 헐렁해지다 보니 덕분에 옷장이 가볍다. 친구들이 옷장을 보고 여름옷이 이게 다야? 할 정도로 강제 미니'멋’ 라이프를 실천하게 되었다.



2. 책장

6칸 중에 중간 두 층은 바닥이 휘어질 정도로 책장에 책이 꽉 찼다. 책장 지분을 보니까 나의 책 편식이 놀랍다. 50%는 미술 책(화가의 전기나 에세이, 미술 이론, 그림책..) 30%는 아프리카, 여행, 역사책. 그리고 나머지 20%에 자기 계발, 에세이, 철학, 소설, 사놓고 안 읽은 주식책도 2권으로 2% 정도 차지. 압도적으로 미술과 여행이 많다. 순전히 지식을 얻으려고 책을 읽는구나. 이렇게 문학 파트가 없어서야! 상상력은 없고 죄다 현실이야! 왜 내게 로맨스가 없는지 알겠다!


사실 2년이 멀다 하고 지겹게 짐을 싸다 풀다 하다 보니 책을 잘 안 사게 된다. 음식은 먹어서 없애고 옷은 유행 지나면 버리는데 낡은 책은 괜히 또 애틋해지잖아. 두 번 읽으면 새로운 교훈을 발견할 것 같고. 하지만 매일 누워서 인스타 보며 시간을 버릴지언정 절대 같은 책을 두 번 읽지는 않지. 그렇게 못 버리고 싸놓다 보면 이사 갈 때 부피 대비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정직한 육면체 책은 박스에 차곡차곡 빈틈없이 쌓인다. 사과박스 뇌물이 괜히 몇 억 씩 되는 게 아냐!


그런데 대학원에 오니까 교수님이 언급하시는 책들은 다 대단한 책 같아서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사다 보니 책장이 한도 초과. 얼마 전 대학원 2년간 인터넷 서점 주문내역과 도서관 대여 내역을 세 봤는데 100권이 넘더라. 거기에 도서관에서 꺼내 읽은 책, 서점이나 박물관에서 한 두 권씩 사온 책, 교수님이 교실에 가득 채워주신 그림책까지 세면 아마 또 백 권은 족히 될 것 같은데. 그리고 내 책장 속 책은 진짜 내 마음에 드는 책만 모셔왔기 때문에 보고 또 꺼내본 책. 그야말로 책에 둘러싸여 2년을 보냈다. 책을 이 백 권 넘게 봤으니 2년 동안 한 게 아예 없진 않네. 지금은 집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짐이 없는 척을 해야 해서 책장을 천으로 가려놨는데, 새로 가는 집에는 전면 책장을 두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넓게 펼쳐놓고 싶다. 예쁜 표지만 봐도 행복해지게. 꺼내서 읽지는 않더라도.



3. 침대

머리맡에는 주말에 늦잠 자고 일어나 읽는 베겟머리책 하나, 매일 아침저녁으로 쓰는 감사일기 노트 하나가 있다. 요즘은 집 문제 때문에 여러 사람과 씨름 중이라 싸우기 전 날엔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한 챕터씩 읽고 전략을 장전해 간다. 감사일기는 새해에 새 노트로 바꿔서 쓰고 있다. 아직 3월일 때 반을 넘게 써서 ‘어머나~ 올해 두 권은 쓰겠네~기특해~’ 했는데 4월부터는 감사할 일이 없어졌는지 빼먹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작년 초, 전 남자 친구가 미워질 때부터 미워하지 말고 감사한 점을 떠올려 보자 하고 쓰기 시작했는데 계속 계속 미워지다가 끝내 헤어졌고, 이제 헤어졌으니 미워할 이유가 없잖아요. 감사할 이유도 없고요. 좋은 기억 준걸로 감사하게 해 주세요 하고 더 썼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멈춘 것만으로 감사일기 너의 소임은 다 했다. ‘저 사람은 왜 내 마음을 몰라주지’에서 ‘내가 내 마음 알아주자’로 바꿔 생각하게 됐으니까.



4. 창문

침대 맡 창가에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수집품을 진열했다. 칸일 칼릴리 시장 조르디 마켓에서 팔던 싸구려 유리 향수병에 바하리야 사막에서 필름통에 반 줌 가져온 모래를 넣었다. 다합 해변에 굴러다니던 새끼손가락만 한 산호도 하나 가져왔다. 언제고 떠올리면 따뜻한 바람이 뺨에 스치는 이집트. 꼭 다시 가야지.


액자도 있다. 대학원에 와서 매년 9월 재학생 과제전을 열었다. 찾아와 준 친구들의 사진을 모아 붙여 작은 액자를 세워놓았다. 전 남친과 놀러 다니며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헤어지면서 떼 버렸다. 뗀 부분이 그대로 텅 비어서 그냥 액자를 엎어 놓았다.

 

창가에서 종일 햇살을 찾는 화분도 두 개 있다. 하나는 1학년 과제전 때 선물 받은 스투키, 다른 하나는 2학년 과제전 때 선물 받은 카피라. 카피라는 지난 12월 말에 학교 작업실 짐을 빼며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방에 도저히 놓을 데가 없어서 책상에 두었더니 노트북 열기에 며칠 만에 잎을 다 떨구었다. 불과 며칠 전엔 한겨울 추운 작업실에서도 생생하게 초록빛을 뿜던 아이가 단 며칠 만에 잎이 갈색으로 싹 시들어버린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다. 내가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라니. 이 친구의 비명소리도 못 들어줄 정도로 짐이 가득한 공간에서 짐처럼 사는 내 처지가 싫었다.


그렇게 겨울 내내 창가에 두고

“미안해. 우리 힘내자. 봄이 금방 올 거니까 그때까지 죽지 말고 잘 버티자. 봄이 되면 새싹을 틔우자”

하며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인사했다.


3월이 되어 햇살이 조금 달라졌다 느껴질 때 거짓말처럼 이 친구가 초록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아침에 가지에 새싹 하나가 빼꼼 말려있다가 밤에 와서 보면 그 싹이 세상을 밀고 나와 나에게 까꿍!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되었다.



5. 그림도구 : 그림만 그리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학교 작업실에 있던 그림도구를 전부 원룸으로 가져오니까 방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신발장 위에 플라스틱 수납장을 또 얹어서 짐을 간신히 벽으로 부쳐놓았다. 꼭대기는 아슬아슬 절벽 같다. 이 좁은 집에서 종이와 도구를 다시 찾아 꺼낸다는 게 까마득해서 미루기만 하다가 4월에 덜컥 코로나에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 며칠 만에 기력을 회복해서 작은 정육면체 박스에 갇혀있는 게 고문 같던 차에 (+앞집 커플과 고양이가 트는 육체의 사운드 고문) 방 구조를 바꿔서 어떻게든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침대 옆에 좌식 밥상을 펴고 노트북을 내려다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맡의 밥상에서 일하고, 일 마치고 점심부터는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책상에는 큰 독서대 위에 화판을 올리고 재료는 연필과 지우개 한 개씩만 꺼내고 그림 역시 미완성 그림을 한 장씩만 꺼내 완성해서 집어넣었다. 그렇게 하루에 한 장씩, 코로나 격리기 간에 4장을 그렸다. 학교를 떠난 1월부터 4월까지 한 장도 못 그렸었는데.



5. 책상. 엄마의 편지.

지난 9 학교 단체 과제전에 엄마가 다녀갔었다. 재작년 과제전에는 엄마에게 알리지 않았다가 작년엔 알릴  있어서 내심 기뻤다. 엄마는 내가 그림 전시회를 여는 대단한 작가가   알고 입고  예쁜 옷을 새로 사야겠다며 잠시 즐거운 착각에 빠졌었다.


엄마는 전시에 와서 내가 그린 알쏭달쏭 아프리카 그림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 그림까지 꽃 향기를 맡듯 꽃봉오리를 들여다보듯 가까이에서 천천히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엄마는 떠나면서 병아리색 봉투를 하나 건네줬는데 그 안에는 용돈 30만 원과 편지 한 장이 있었다. 이 편지를 벽에 매달아 놓고 겨우 내 매일같이 추궁했다. 진짜냐고. 그게 진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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