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마디 Oct 21. 2023

상봉

도로명 주소

어수선한 집을 몇 개 더 보고서 아저씨도 뭔가 한방이 없다 싶었는지 분리형 원룸은 어떠냐며 “바로 근처예요~” 하면서 또 차에 태웠다. 하지만 역시나 원룸은 가지 않기로 했다. 사실 한방이 없는 건 이렇게 집이 많은 동네에서 아저씨 탓이 아니지. 청년 전세대출 한도가 최대 90%, 1억이라서 대출을 풀로 당긴다면 1억 1천만 원 까지는 집을 봐도 된다. 하지만 대학원 학자금 대출받은 게 있어서 혹시 1억까지 안 나올까 봐 웬만하면 1억 미만으로 찾다 보니 아저씨가 여기저기 다른 부동산에 수소문해도 그 가격엔 집이 참 없었다. 수화기 너머 다른 아저씨, 다른 아줌마의 안타까운 목소리 “아유~ 그 아가씨 진짜 1억까지밖에 안된대?” “1억 2천은? 3천은?” 이 일대 멀끔한 집은 1억 2천부터 시작하나 보다.


“그래요 원룸은 안 간다고 하셨죠~ 하긴 여기 갈 바엔 아까 봤던 그 투룸이 낫다 그죠?”

20년 넘게 동사무소에서 민원인을 상대했다는 아저씨는 말을 참 재밌게 하셨다. 은퇴하시고는 노후 일거리를 위해 심리상담사 2급과 공인중개사를 따고 부동산을 개업하셨다는데 전부 사람들 사정을 들어주는 일이라 적성에 잘 맞아 재밌게 하고 있다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들의 특징은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고개가 앞으로 쭉 나온 거북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입술이 두툼하거나 튀어나왔다. 아저씨는 눈, 입술, 고개가 다 돌출형이다.


16개 동이 있는 중랑구라는 큰 동네. 1990년대 말 신혼 때 이 동네에 자리 잡으시곤 외동아들이 어느새 대학생으로 크는 동안 동네는 참 많이 변했다고 한다. 중랑구는 원래 서울이 아니었다. 1962년 전에는 경기도 양주군 땅이었다가 서울이 행정구역을 동서남북으로 크게 확장하면서 서울의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 동대문구에서 중랑구 17개 동으로 분리 신설되었다. 이유는 서울의 급격한 산업화로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만이 살 길이다’ 경제정책 아래 1960년대부터 서울 곳곳에 공업지구가 들어섰다. 서울 도심에는 청계천 주변 동대문 봉제공장이, 변두리 산업단지로는 구로의 전자 섬유공장, 영등포 기계공장, 마장동 축산시장과 그 옆 성수동 가죽공장, 그리고 성수동 위 여기 중랑구에는 연탄공장이 크게 들어섰다. 시골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상경한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공장으로 몰려왔고 공장 주변에 판자촌을 이루었다. 1966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인구 15년의 데이터를 평균 내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000명씩 인구가 늘어났다.


상봉이 서울 변두리 공장단지 동네에서 시작한 만큼 오랫동안 ‘못 사는 동네’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좀 보세요~ 아파트 싹 들어섰잖아요. 신혼부부들 많이 오면서 동네 분위기가 싹 바뀌었어요. 이마트 홈플러스 들어오고요, 중랑천 산책로 새로 싹 깔고 공원도 많이 만들고요. 집값이 얼마나 올랐게요. 그리고 7호선이 뚫리면서 건대 강남 전철로 15분이면 가요. 굉장히 가까워졌어요. 그 동네는 집값이 너무 비싸니까 여기에 집을 구하고 출퇴근하는 사람들 많아요. 웃기죠? 강남에 출근하려고 강북에 집을 구하고. 근데 그렇다니까요.”

지번주소가 도로명주소로 싹 바뀌면서 더 이상 ‘동’을 쓰지 않기 때문에 동네마다 싫은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었다. 어른들이야 “거기 못 사는 동네 아냐?” 하지 우리 같은 젊은이들은 이렇게 모른다. 그런데 이 동네에 오래 산 사장님은 도로명주소가 눈에 익지 않아서 주소를 받으면 다시 지번 주소로 바꿔 검색해서 ‘아~ 거기?’ 하고는 핸드폰 케이스 덮개를 덮고 네비 없이 찾아가는 귀여운 상황.



이전 05화 면목동, 우림시장 근처, 4층, 9000, 투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