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넘게 그림책 수업에 나가고 있다. '그림을 잘 못 그리는데 잘 해낼 수 있을까?' 잔뜩 쫄고 들어간 수업에서 난 예상치 않게 쾌재를 불렀다. 그림책은 '철학'과 '심리학'이라는 선생님의 말 덕분이었다. 내가 가장 배우고 싶은, 관심있는 두 학문을 한 자리에서 버무릴 수 있다니(?) 드디어 내 자리를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빵빵한 풍선처럼 꽉 차는 기분이 들었다.
그림책은 철학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내가 그간 무심코 지나쳤던 수많은 일상 속 숨겨진 일상을 관찰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러한 철학을 인간의 심리와 함께 잘 풀어내기 위해 '게슈탈트 심리치료'라는 두꺼운 책도 읽고 있다. 이 두꺼운 책을 읽으면서 매순간 설레는 감정을 느낄 정도이니 내가 그간 얼마나 이런 공부를 간절하게 원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실패, 삶의 무게중심, 완벽, 연약함과 유연함 등 그려내고 싶은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게 많았지만 내가 진짜 마음 속 깊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아직 못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어제 오늘, 그 키워드를 건져올렸다. 바로 '성장'이란 단어였다.워워- 이 글에서 '성장'이라는 단어가 나온 이 순간, 입이 삐쭉거려지고 맥이 탁 풀린 독자가 있다면 실망감은 잠시 넣어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러한 우려를 한 이유는 내가 '성장'이라는 단어에 편견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간 성공을 위한 성장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자란 나는 '성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일단 숨이 막힌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성장은 어떤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늘 지금보다 괜찮아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 성장하는 삶을 살면서도 '성장'이라는 단어는 싫어하는 내가 처음부터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처음 내가 생각한 단어는 '공허함'이었다.
인간은 필수불가결하게 공허함을 느끼지만 나는 특히나 남들보다 '공허함'을 잘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지금 가장 기억나는 순간을 적어보자면 회사원 시절, 홀로 점심을 먹기 위해 건물을 나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며 늘 불투명하고 거대한 모양의 공허함을 느꼈다. '오늘은 뭘 먹을까?'라는 생각보다 '뭘 위해서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할까?' 라는 생각이 앞섰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면 대화에 집중하느라 훨씬 덜했지만 순간 순간 멕이 풀린 듯 탁-하고 밀려드는 공허함은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목표없는 몰입
그런데 예민한 공허함 센서를 가진 내가 공허함을 거의 느끼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다. 바로 출산하고 복직 전까지 온전히 아이를 양육했던 10개월의 시간이었다. 나의 첫 아가는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있어 조금만 맘에 들지 않으면 삑 하고 울어버리는 습성(?)이 있다. 오죽하면 하루종일 양치, 세수도 못 하고 둥가둥가만 시전하던 날도 있다. 시부모님도 새어머니도 애 보러 오셨다가 '네가 고생이 참 많다'며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린 내 아기, 가족이 보기에도 키우기 쉬운 스타일은 아니었다. (ㅋㅋ)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가장 힘들었던 이 시기가 나는 인생에서 가장 평온하고 진득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성과중심적인 내가 육아라는 잠시 쉬어갈 명분을 얻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이런 의심도 해보고 그저 기억이 미화돼서 그런 걸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 충만한 느낌은 인생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으므로 무언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전업 육아에서 벗어나면서 충만감 역시 자연스럽게 잊혀졌는데, 최근 아이가 수족구에 걸리면서 다시 그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내가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토록 즐거웠던 이유가 '몰입' 덕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몰입이라는 단어 앞에 나는 '목표없는'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 나는 집중력이 좋아서 그런지 '몰입'을 꽤나 잘 하는 사람이다. 회사 생활을 할 때 오디오 편집을 하거나, 종종 브런치에 글을 올릴 때도 몰입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오디오 편집은 반드시 해야 하는, 당위성 있는 수동적인 행위였으며 브런치에 쓴 몇몇 글은 마감일을 지키기 위한 목표가 있었으므로 순도 100%의 몰입은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가장 큰 몰입의 조건이 '목표없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양육에서 목표는 없다. 하루종일 아이를 케어하는 행위에 집중하는 것, 그것 뿐이다. 이 행위를 통해 나의 자아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목표없는 몰입'이라는 정답을 찾아낸 데는 최근 두 가지 영상이 힌트를 주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라이프 코드라는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이제 부디 '목표 없이' 그냥 사세요라는 영상, 두 번째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라는 강의다.
첫 번째 영상은, 우리가 '목표없는 치열'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토크쇼 진행자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목표를 세워야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잘못 세뇌되며 살아왔다며, 목표가 있는 치열을 '병든 치열'이라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치열을 위한 치열', 즉 목표없이 치열하기만 삶을 살아야 현존할 수 있고 충만감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나는 그의 말에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내가 목표없이 살았던 지난 삶을 반성하고 목표를 세웠다고 쓴 글을 지워야 하나 갈팡질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각설하고 이 이야기를 듣는데, 자연스럽게 전업 육아 시절과 그림책을 배우는 요즘의 일상이 떠올랐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육아는 목표없이 치열한 현생을 즐기는 순간임이 틀림없고, 그림책을 배우는 요즘을 떠올린 이유는 내가 가슴 뛰는 일을 매일 즐겁고 능동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그림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그런지 스스로에게 큰 기대치와 목표가 없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나는 아주 매일 치열한, 치열을 위한 삶을 사는 요즘이 무척이나 즐겁다.
두 번째 영상은, 톨스토이가 인생에서 추구했던 가장 큰 가치 '성장'에 대해 설명하는 강의였다. 그는 '성장'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꼽았는데 1) 몰입 2) 소통 3)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는 책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몰입의 충만함을 보여준다. 지주인 그는 농부처럼 밖에 나가 풀을 벨 필요가 없지만 어느 날 문득 풀을 베고 싶어서 풀을 베러 나갔다가 몰입의 경지인, 무아지경를 경험한다. 그가 말하는 몰입은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레빈을 통해 얘기한다. 우리가 '몰입'을 통해 자아에서 해방될 수 있고 세상과의 교감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의 말처럼 내 존재가 잊혀지고 온전히 행위에만 집중하게 되는 '몰입'의 감정은 육체가 있고 생각이 많은 인간으로서 겪을 때마다 황홀한 감정이 아닐 수 없다.
몰입을 통한 성장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나는 인간이 공허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 부르는 충만한 속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현존하는 삶이 답이란 결론을 내렸다.
어릴 때부터 나는 누가봐도 '열정맨'이었다. 가끔은 이러한 삶에 대한 내 열정이 학습된 '생산성'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 때도 있었는데, 위에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난 그저 매일을 살아가는 데 진심인 사람임이 분명하다. 목표없는 치열함으로 살아온, 그래서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내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톨스토이 선생님 무한 감사!) 그리고 엄마가 된 덕분에 치열을 위한 치열한 삶을 더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것 같아서 아이에게도 무한 감사하다.
최근에도 하나의 목표가 나를 유혹하고 있다. '잘 해서 우리 책 내봅시다!'라는 선생님의 말. 목표가 생기니 의지는 사그라들고 걱정이 더 앞선다. 출판을 염두하지 않고 그저 이 과정에 치열하게 임해서 즐겁고 싶다고 다짐한다. 치열하기만 하면 성장하며 수많은 갈래의 길과 나는 마주하게 될 것이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질테니까! (지난 주에는 카페에서 스토리보드에 시금치와 문어(스포)를 그리다 반나절이 순삭된 경험도 했다. 그 순간만큼은 무아지경으로 풀을 베는 나레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