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겨웠던 분위기는 일시에 정지되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영 만이 차현준에게 여기는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와인을 한 입에 털어 넣은 차현준이 싱긋 웃으며 꽃다발을 서아에게 내밀었다.
진한 핑크색 피아노 장미와 그린 라넌큘러스, 은엽 아카시아로 만든 꽃다발은 그걸 준 사람이 차현준만 아니라면 기꺼이 감동할 만큼 화려하고 개성 있는 꽃다발이었다.
“안 받으시는 건가요? 달콤에 알바로 출연했던 인연으로 결혼을 축하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건데 싫으신 거예요? 이거 정말 섭섭한데요. 제가 알기로는 이 결혼이 다 제 덕분인 거 같던데.”
우혁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고 무릎을 덮었던 냅킨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무슨 일이니?”
우혁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무슨 일이라니요? 기껏 설명드렸잖습니까. 두 분 결혼 축하드리려고 일부러 왔다고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달콤에 나가지도 않았을 거고 결혼도 하지 않았을 건데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도 이렇게 냉대하시면 안 되지요.”
“뭐야?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채영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보다 못한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우혁이 팔로 가로막았다.
“서아야, 잠깐 얘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먹고 있어.”
서아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석아,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져서 미안한데 네가 숙녀분들을 즐겁게 해 드려라. 조용히 이야기기만 하고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민석은 대답 대신 손으로 우혁의 팔을 잡았다 놓았다. 서아가 받지 않은 꽃다발을 테이블에 놔둔 채 차현준이 우혁을 따라나섰다.
채영은 그제야 자신이 남주로 차현준을 거론했을 때 서아의 반응이 기억나 뭔가 있구나 싶었다.
“차현준 쟤가 우혁 오빠하고 뭔가 있구나?”
민석이 자세한 말은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고 하지 말아야지. 내가 묻는다고 사연이 나올 것 같지도 않으니 나는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언니 어떻게 해요?”
서아가 아쉬운 듯 따라 일어서자 채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신부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나 쓸데없는 소리 떠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민석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 채영을 배웅 나갔다. 서아도 따라 나가고 싶어 했지만 채영의 만류에 나갈 수가 없었다.
레스토랑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테라스 끝,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우혁과 차현준을 발견하고 모른 체했다.
“채영이가 가는 모양이네요.”
“네가 분위기를 깼으니까.”
“이거 왜 이러실까? 내가 무슨 분위기를 깹니까. 나는 그저 축하 꽃다발을 전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네 성의가 고맙지 않아서 미안하구나.”
차현준이 갑자기 상체를 우혁 가까이 기울이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겁나지 않으세요?”
흠칫 놀란 우혁이 몸을 뒤로 젖히며 차현우를 바라보았다.
“아니 겁나지 않아.”
“거짓말. 잃을 게 있는 사람은 겁나는 건데.”
“잃을 거?”
차현준은 도통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수시로 바꿔가며 우혁을 응시했다. 마치 가면을 벗으면 또 다른 가면, 그 가면 아래 다시 가면이 있는 것만 같았다.
“선배님은 너무 무미건조한 삶은 사셨어요. 그래서 내가 영 재미가 없었는데 이제 잃기 싫은 게 아니 도저히 잃을 수 없는 게 생겼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너무 짜릿해요.”
“닥쳐, 네가 언제까지 날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제가 생각해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정말 재미있었는데 그게 끝날 걸 생각하니 막 아쉬워요.”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니? 나는 네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어.”
우혁은 지난번에 네가 말했던 선수와 초이스에 대해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었다. 네가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거냐고 멱살을 잡고 머리를 흔들어대며 묻고 싶었다. 차현준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야기를 그가 먼저 꺼낼 수 없어서 입안에서 뱅뱅 도는 말을 삼키며 다른 질문만 했다.
“지난번에 말했을 텐데. 선배가 그날 보지 말았어야 하는 걸 본 게 싫다고. 그래서 선배를 안 보고 싶다고요.”
“보지 마. 안 보면 되잖아.”
“에이, 어떻게 강우혁을 안 보고 살아요. 저 광고판에도 강우혁이 나오는데.”
차현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대형 전광판에서 우혁이 러닝화를 신고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달리는 우혁의 다리가 어찌나 경쾌한지 보는 사람도 다리가 들썩일 지경이었다.
“그럼 넌 내가 연예계를 떠날 때까지 나를 괴롭히겠다는 거니?”
“빙고! 맞습니다. 선배님.”
차현준이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턱을 고인 채 끈적거리는 눈빛으로 우혁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이 순간을 본다면 둘이 사귄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너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은데 그렇게 겁이 나냐?”
차현준은 피식거리며 웃기만 했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널 공격할 수밖에 없을 거다. 너한테 당한 사람이 어디 이가영 하나겠니? 나도 공격에 나서야지 별수 있니?”
“선배님은 못 할 겁니다.”
“어째서?”
“잃고 싶지 않은 게 있으니까요. 저를 파멸시키려면 선배님도 같이 파멸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그 파멸의 시작이 은서아를 잃는 것이겠지요?”
‘이 개자식, 너 도대체 뭘 얼마나 가지고 있기에 이런 소리를 하는 거니? 널 죽여 버릴 거야!’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 두들겨 패고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서 차현준이 앉아 있는 의자 다리를 걷어차 그를 곤두박질치게 만들고 싶었다. 녀석 하나 두들겨 패서 코 뼈랑 갈비뼈 정도 부러트리는 건 일도 아니다.
“내 좋은 날 이 정도 망쳤으면 됐으니 꺼져라.”
우혁은 솟구치는 분노를 누르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선배님이 가라면 가야지요. 그런데 선배님 저한테는 청첩장 안 보내실 건가요?”
“안 보낸다. 내 결혼식에 개나 소나 다 부르지 않는다.”
“후후, 개나? 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