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서 일어선 차현준이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허리를 굽히며 우혁을 바라보았다.
“행복하십시오. 선배님. 저는 선배님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차현준이 휘적휘적 걸어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저거 내가 한 번 진지하게 만나볼까?”
차현준이 빠진 자리에 민석이 털썩 앉으며 물었다. 그 말속에는 뭔가 거래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차현준에게 을이 되고 말 거다. 우혁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신경 쓰지 마. 저 자식 저러다 말 거야.”
민석은 할 말이 많았지만 우혁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춥다. 너 먼저 가라. 나는 서아랑 좀 더 있다 갈게.”
우혁이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민석은 그대로 앉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우혁은 그런 민석을 내버려 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민석은 우혁이 뭔가 자신에게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차현준이 우혁과 서아의 가짜 열애설을 터트리고도 그게 별 의미 없어진 지금 저토록 느긋한 것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었다.
뭘까? 소속사 대표의 입장에서 우혁이 감추고 있는 게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면 알아내고 대책을 세워야 할 일이다. 이제 JK401 대표로서 일을 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아는 지난번 우혁이 차현준을 만났던 날처럼 오늘도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서아의 걱정과 달리 테이블로 돌아온 우혁은 활짝 웃으며 서아의 손을 잡았다.
“오늘 네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고 내가 진짜 결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
서아는 자신의 왼손을 잡은 우혁의 손 위에 오른손을 겹쳐 올리며 말했다.
“억지로 웃을 필요 없어.”
“그렇다고 울 만큼 괴롭지도 않아. 차현준이 그 자식 겁 많은 개에 불과해. 겁이 나니까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거야.”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여기저기서 술렁거리는 사람들이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우혁과 서아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눈이다.”
서아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제법 굵은 눈송이가 하늘하늘거리며 날리고 있었다. 때마침 '윈터 베어(winter bear)'노래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넋을 잃은 듯 점점 더 굵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뷔의 매력적인 음색은 창밖에 있는 눈을 실내로 끌어들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좀 걸을까?”
우혁의 말에 서아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자 얇게 쌓인 눈이 레스토랑 마당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차에서 커다란 우산을 꺼낸 우혁이 서아의 머리 위에 씌워주고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아는 강아지처럼 자꾸만 우산 밖으로 뛰쳐나갔다.
강아지는 발이 시려서 폴짝거리고 뛰는 거라는데 서아는 우혁과 행복하고 싶은 마음에 뛰었다. 차현준이 망쳐버린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은서아, 너 눈 오는 거 처음 보니? 무슨 눈이 그렇게 좋아?”
서아는 고개를 젖히고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눈을 맞았다. 눈이 얼굴에 닿는 순간 그 차가움이 흐릿한 머릿속을 맑게 해주는 것만 같아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다.
“오빠는 안 좋아? 내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날 눈이 오는데 안 좋아?”
서아가 갑자기 우산 안으로 뛰어 들어와 우혁의 팔을 잡고 물었다. 자신의 몸에 매달려 순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는 서아를 본 순간 우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차현준의 말이 맞다. 그는 도저히 잃고 싶지 않은 게 생겼다.
우혁의 손에서 우산이 툭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우산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데구르르 굴렀다. 인적이 드문 레스토랑 뒷길에 눈이 쌓인 자리를 우산이 쓸어내고 있었다.
우산을 놓친 우혁의 양손이 서아의 뺨을 움켜쥐었다. 우혁의 손에 비해 서아의 뺨이 훨씬 차가웠다. 그 차가운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쥔 우혁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서아는 자신의 시야를 가린 우혁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눈부터 감았다. 귀에서는 레스토랑에서 들려오던 뷔의 달콤한 노랫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I want some good day…….’
따스한 우혁의 입김이 차가운 서아의 입술을 열며 조금씩, 조금씩 더 깊게 다가섰다. 서아의 손이 우혁의 코트 자락 안으로 파고들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가 시리도록 달콤한 맛이 서아의 등줄기를 저릿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골목길로 들어오다 멈칫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혁이 멈출 줄 알았지만 그들이 돌아갔다. 서아는 우혁을 말리고 싶지 않았다. 눈이 그의 어깨와 서아의 등을 덮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고양이 한 마리가 쫓기듯 후다닥 달려오다 우혁의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놀란 우혁이 흠칫하며 서아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고양이는 자기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는지 멀뚱한 표정으로 우혁을 올려다봤다.
“너 뭐냐?”
우혁의 질문에 고양이가 야옹 오옹 소리를 크게 내고 휙 돌아서서 달아났다.
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우혁도 같이 웃으며 서아를 코트 속으로 잡아끌었다. 서아는 우혁의 가슴에 코를 묻고 얼굴을 비볐다. 그의 셔츠에 파운데이션이 묻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세탁할 거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얼굴을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