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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부케의 주인

by 은예진

서아에게 드레스를 입히려고 나온 아쉬 스튜디오 직원들의 시선이 그녀의 브래지어 위쪽으로 핀 붉은 꽃에 멈췄다. 그 꽃의 주인이 오늘의 신랑 강우혁이라는 것을 떠올린 여직원들의 눈빛에 야릇한 기운이 서렸다.


직원들과 눈이 마주친 서아는 재빨리 고개를 떨어트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여직원들이 결혼식 날 아침까지 그렇게 격렬하게 흔적을 남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부끄러웠다.


어쩔 수 없었다. 그 부끄러움을 뛰어넘는 뜨거운 시간이었다.


금방 벨이 울리고 민석과 방송 팀이 찾아올 것만 같은 초조함 속에 시작한 사랑은 두 사람 모두를 불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결혼식 날 아침에 최고의 사랑을 하다니 뭔가 흐뭇해서 자꾸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온몸이 터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터지기 직전에 우혁에게 구조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신부를 돕기 위해 출동한 오늘의 도우미는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준 세진이었다. 농사짓느라 거칠어진 피부를 관리한다고 날마다 팩 하는 사진을 보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내 친구 은서아가 이렇게 예쁜 신부가 되다니 실감이 안 난다.”


세진의 말에 서아가 뒤를 돌아보고 살포시 웃었다. 서아의 손에 들린 작은 은방울꽃 부케는 채영의 선물이었다. 자기가 받을 부케는 자기가 선물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를 펴며 부케를 선물했다. 심플하게 은방울꽃만으로 만들어진 작은 부케는 고급스럽고 예뻤다.


“이게 윤채영이 선물한 부케라 이거지. 역시 눈 높은 사람들이 고른 건 달라도 다르구나. 우아하고 품위 있는 드레스에 딱 맞췄어.”

“그렇지?”


서아가 리본에 묶인 은방울꽃 부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달콤 제작진 카메라가 들이닥치고 구 작가가 들어왔다.


“신혼여행이 없어서 오늘이 시즌 일 마지막이라니 너무 아쉬워요.”

“시즌 일이라니 시즌 투도 있어요?”


서아가 몹시 놀란 표정으로 묻자 구 작가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방송이 그렇게 겁나세요? 그동안 자연스럽게 잘하기에 부담 하나도 안 느끼는 줄 알았는데.”

“아하 그게…….”


서아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맸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연예인이 아닌 그녀가 이런 식으로 대중에게 노출되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걱정 마, 서아야! 시즌 투 안 찍을 거니까.”


턱시도 차림의 우혁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우혁에게 쏠렸다. 결혼식을 앞두고 드라마가 잡히는 바람에 몸 관리를 더 열심히 했다. 조각가가 사포질을 하듯 다듬어 놓은 몸에 턱시도를 입자 그가 걷는 길은 모두 런웨이처럼 보인다.


“네가 말하던 태양처럼 제 스스로 빛나는 별이 오신다.”


세진이 서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서아는 아직 우혁이 턱시도 입은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눈이 부신 듯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신부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우혁이 팔을 내밀자 서아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나 눈부시게 하려고 그동안 안 보여줬지?”


우혁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계 인사들이 총출동해 하객 패션을 선보이고 포토라인에서 사진을 찍었다. 식의 내용은 방송에서 최초 공개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혁이 서아를 데리고 식장으로 갔다. 신부 대기실로 들어가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고윤희와 제인이 환호성을 질렀다.


“예쁘다. 정말 예뻐. 역시 우리 딸이 최고야.”


고윤희가 우리 딸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제인은 입을 반쯤 벌리고 우혁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는지 머리를 흔들며 서아 옆으로 다가갔다.


“언니, 결혼 축하해요.”

“고맙다. 제인아.”


서아가 제인의 손을 꽉 잡았다. 날씬한 수준을 넘어서 이제 뼈가 드러나기 시작한 제인의 모습을 보며 신경이 쓰였다.


고윤희는 신부를 만나기 위해 들어오는 유명 연예인들을 볼 때마다 서아 옆에 들러붙으며 사진을 찍자고 졸랐다. 보다 못한 서아가 미간을 찡그렸지만 세진이 좋은 날이니 그냥 봐주라며 서아를 다독였다.


달콤한 너의 맛 팀에서 기획한 결혼식이라 식의 내용은 디너쇼를 방불케 했다. 유명 아이돌과 팝페라 가수가 축가를 부르고 정열적인 탱고 공연까지 있었다. 뮤지컬 가수들이 나와 하객들 사이를 돌며 장미꽃을 나누어 주며 결혼을 축복했다.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부케를 던졌다. 채영은 부케를 받기 위해 한껏 긴장한 얼굴로 나섰다.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하면서도 서아의 부케는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아는 채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뒤돌아서서 심호흡을 했다.


채영을 처음 만나 잔뜩 긴장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때는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채영 언니, 내 부케 받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해져요.’


서아가 마음속으로 빌며 부케를 뒤로 던졌다. 부케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그녀의 품에 부드럽게 안겼다. 서아가 두 손을 모으며 활짝 웃고 하객들을 향해 돌아서는 순간 술렁거림이 일었다.


채영이 빈손을 보며 당황한 듯 부케를 찾았다. 엉뚱하게 카메라 뒤에 서 있던 구 작가가 은방울꽃 부케를 들고 어쩔 줄 몰라했다. 부케를 받은 그녀는 채영이 아닌 구 작가가 되었다.


하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상황을 깨달은 구 작가가 다급하게 부케를 들고 채영에게 다가갔다.


“이게 왜 저한테 왔는지 모르겠어요. 다시 하세요.”


채영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짜증이 잔뜩 난 표정을 지었다.


“됐습니다. 이 부케의 주인은 작가님인가 보네요.”


신경질을 내며 자리를 뜨는 채영을 보고 서아와 구 작가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 마음도 모른 체 하객들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키득거렸다.


부케 사건을 제외하고는 순탄한 결혼식이었다. 피로연이 끝나고 하객들이 모두 돌아갔다. 카메라도 꺼지고 고윤희 모녀는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뒷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민석을 남겨둔 채 신랑 신부는 다시 스위트룸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끝났어.”


우혁이 턱시도도 벗지 않은 채 서아를 끌어안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달콤의 카메라도 고윤희 여사도 이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하네.”


우혁의 팔꿈치를 세워 머리를 기대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이제 여보를 나만 볼 수 있게 돼서 좋다.”

“여보? 으악!”


서아가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그게 재미있는지 우혁은 계속 여보야, 자기야 사랑해를 반복하며 서아를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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