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은 말띠 아이의 말말말
‘폴라익스프레스’를 하루도 안 빠지고 보는 아이. 외우겠다.
그 영화가 끝나고 나면... “@#$%^&*(“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등장인물들 흉내를 낸다. 영어를 따라하는 거겠지? 몇 번이고 보고 또 본다 해서
"세진아. 낮잠 자고 일어나서 밤이 되면 그때 또 틀어 줄께"
"네"
아이는 대답 하고 바로 낮잠 자러 들어갔다. 한참을 자고 저녁 무렵 일어나 거실로 나온 아이.
"엄마 눈부셔. 불 끌래"
"응, 세진이가 꺼."
불을 끄고 오더니 아이가 말한다.
"엄마. 깜깜한 밤이 되었지? 그러니까 폴라익스 틀어줘"
이제 거짓말도 못하겠구나. 엄청난 기억력. 놀랍다.
[2004년 12월 어느 날의 기록]
아이의 기억력은 가끔은 무섭기까지 하다. 아이는 엄마의 말에 집중한다. 엄마가 한 말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엄마가 말 했으니 그대로 해줄 거라는 믿음. 엄마, 어른에 대한 믿음. 아이가 엄마를 믿는 만큼 과연 엄마도 아이를 믿고 있을까? 돌이켜 보면 의심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아기때야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커가는 과정에서 아이는 자잘한 많은 거짓말들을 했다. 핸드폰을 조금 더 하기 위해, 친구들과 조금 더 놀기 위해, 엄마가 위험하다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해보기 위해. 그런 거짓말들이 쌓이면서 이 아이는 이럴 거라는 나만의 판단으로 아이를 의심했었다.
아이 역시 어떤 말을 해도 엄마가 믿어주지 않는 경험이 많아지면서, 엄마가 했던 수많은 약속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지고 지켜지지 않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결국 엄마를 믿지 못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게 되고, 입을 닫게 되었다. 서로.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에 대한 벽을 쌓아둔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조금씩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응어리들이 하나둘 씩 풀려가고 있는 것 같다. 우선 나의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아이의 말을 들어주기로, 무조건 믿어주기로, 내가 먼저 다가가기로, 내가 먼저 노력하기로.
요즘은 약속을 하면 바로 알람으로 설정해 둔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기로 했으면 그 자리에서 예약을 한다. 변수가 생길 경우 자세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다.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 신기하게도 아이는 엄마의 노력을 바로 알아준다. 엄마에 대한 깊은 믿음이 여전히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일까? 아이가 엄마를 믿는 만큼, 아니 그 반의 반 만큼이라도 아이를 믿어준다면 아이와의 관계가 틀어질 일은 없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