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의 습관
다이어트와 운동은 늘 '내일'부터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 내일은 달력에만 존재할 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날이다. 그런데 갱년기가 내일을 오늘로 만들었다. 손가락이 뻣뻣해지기 시작하고, 발뒤꿈치에서 한기가 솟아오르고, 가슴이 답답하고, 숙면을 취하기 어려워지고, 지독한 피로감과 감정 기복,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불안감까지. 이 모든 것이 갱년기 증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걸 이겨내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만 했고 의사는 '갱년기에 운동은 필수'라고 강력 추천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조깅'이었다. 달리기 앱을 다운로드한 후 '매일 30분 달리기'에 도전했다. 시간은 밤 11시. 밤운동은 수면을 방해한다고 권하지 않지만, 매일 할 수 있는 시간이 그 시간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동일한 시간에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헬스장 신규회원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 의하면 정해진 시간에 운동을 하러 가는 사람이 가장 오래, 꾸준히 헬스장을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11시에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면 무조건 몸을 일으켰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얼음이 얼어도, 눈이 내려 쌓여도 패딩을 입고 나가서 달렸다.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보슬비 정도는 맞고 달렸다. (코로나19로 인해 헬스장 가기가 힘든 시기여서 집 근처 축구장 주변을 달렸다.) 하루를 쉬면 이틀을 쉬게 되고, 급기야 포기하게 될까 봐 꾸역꾸역 운동화를 신고 나섰다. '하기 싫다'는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몸을 먼저 움직였다. 일단 운동화를 신고 문을 열고 나서면 어떻게 뛰기 때문이다.
1분에서 시작한 달리기 앱은 서서히 시간을 늘려갔다. 1분 30초, 2분, 5분, 10분... 그리고 8주 만에 마침내 30분을 달렸다. 나의 달리기 속도는 달린다고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분을 달린 날에는 마라톤 풀코스를 달린 것처럼 벅찼다.
내가 포기하지 않고 매일같이 꾸준히 달릴 수 있었던 요소 2가지를 꼽자면 '11시'와 '칭찬'이다. 정해진 시간에 무조건 하는 것으로 습관을 만들었고, 달리기 앱은 그런 나를 쉼 없이 칭찬해 주었다. 달리기를 하는 동안 앱은 '잘하고 있다, 대단하다'라고 쉼 없이 칭찬을 했다. 내 평생 이렇게 많은 칭찬을 들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매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내용의 칭찬을 하는 그게 뭐라고... 위로가 되고 응원이 됐다.
30분을 달릴 수 있게 됐을 무렵부터 달리기의 효과는 무섭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단 수면의 질은 놀랍도록 좋아졌다. 갱년기가 시작된 후 새벽에 몇 번씩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해 뒤척이곤 했는데, 아침까지 내리 자게 되었다. 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하던 증상도 없어졌다. (당연히 인스턴트 음식을 줄이는 등의 음식조절도 했다.) 괜한 걱정을 사서 하며 불안감에 시달리는 일도 없어졌다. 무엇보다 매일 조금씩 줄어두는 체중계의 숫자는 큰 즐거움이었다.
지금은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에서 달리고 있지만, 어쨌든 조깅을 시작하고 2년. 손가락이 뻣뻣한 증상이나 발뒤꿈치의 한기는 아직도 조금 남아 있지만 그 또한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생각하면서 계속 달리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갱년기는 내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지만 달리기 시작하자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됐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몸이 힘들거나 마음이 우울할 때일수록 그리고 걱정이 많을 때일수록 뭔가를 해야 한다. 끝끝내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가꾼 사람들은 나치수용소의 참혹한 시간도 이겨냈다.
세수를 할 기회가 있는데도 하지 않거나, 신발 끈 매는 것을 에너지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에게 생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 수용소에 들어간 사람은 처음에는 절망감으로 인하여 자신의 외모에 대해 무관심하지만 점차 씻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 테렌스 데 프레 <생존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