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밤을 위한 처방

상추와 바나나 그리고 달리기

by 효문

늦은 저녁 지하철 안, 옆자리에 앉은 청년이 정신없이 졸고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고개가 내 어깨 위로 안착했다. 정신없이 잠든 사람의 머리는 의외로 무겁지만 그냥 잠시 어깨를 빌려주기로 했다. 갱년기 즈음 되면 '아저씨'였던 국군장병은 '남의 집 아들'이 되고, 식당이나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은 '남의 집 딸'로 보이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정신없이 헤드뱅잉을 하다가 내 어깨에 기대 잠든 청년도 '남의 집 귀한 아들'일 테고,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라 하느라 부족한 잠을 잠시 그렇게 보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른으로써 어깨 정도는 잠시 빌려주자. 빌려줘도 어깨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잠이 참 부럽기도 하다.


갱년기는 '문어발'이다. 동반하는 증상은 참 폭넓고도 오묘하다. 처음에는 손가락이 뻣뻣해지는 것이 나의 갱년기 증상인가 싶었지만, 그건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간에 두 눈 말똥말똥 뜨고 있게 만드는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나도 한 때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유리창에 머리를 찧어가면서 꿀잠을 잤고,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힘껏 밀치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가도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고 조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거늘, 내 방 내 침대에서 잠들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날이 올 줄 어찌 알았을까? 아침형 인간이 아닌지라 새해 첫날 큰 마음을 먹어야 겨우 보거나 여행을 가야만 볼 수 있었던 일출을 밀린 숙제 하듯이 거의 매일 보게 돼 날이 올 줄 어찌 알았을까?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 불면의 밤, 1~2시간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나 뒤척이는 토막잠의 밤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런 밤을 보내고 나면 머리는 멍하고, 눈을 빠질 것 같고, 몸은 중력을 버거워했다. 집중력은 바닥을 치고 신경은 곤두섰다.


사람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상상 이상의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사고, 에어프랑스 447편 추락사고, 엑슨 발데즈호의 기름유출 사고의 원인은 수면부족으로 인한 졸음이라고 한다. 미국의 한 할아버지가 아내의 기침소리와 코골이 소리에 일주일 동안 잠을 설치다가 50년을 함께 살아온 배우자를 죽인 경우도 있었다는 뉴스를 본 적도 있다. 또 한 실험에 의하면 24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으면 남을 돕고자 하는 의욕이 78%나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잠'은 결코 소홀히 대접하면 안 되는 무서운 존재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위해 긴급 처방을 내렸다. 틈날 때마다 반신욕 하기. 불면의 밤에 명상하기. 자다기 읽어나 책 읽기(읽다가 졸려서 포기했던 어려운 책들 위주로). 상추와 바나나 열심히 먹기(우유는 잘 안 맞는 관계로 패스) 그리고 달리기. 처방이 여러 가지였던 관계로 무엇이 가장 효과적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운동을 시작하고 1년쯤 지난 어느 날 아침 나는 이 말을 다시 하게 됐다.

"아, 잘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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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방송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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