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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부메랑 Dec 31. 2021

내 안의 '상처 받은 아이'를 만날 수 있다면

내 안에 그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대화, 그리고 놀이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어찌 보면 단촐하고 심플하게 지낸 한 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여전히 불안정했고, 불편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며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이제 이틀 뒤면 나도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 나이의 숫자가 주는 새로운 의미로, 그리고 새해에 대한 기대로 마음은 나름대로 들떠있고 심심하게나마 진동하고 있다.


캘리포니아는 지난주 무렵부터 겨울 장마에 접어들어서 거의 매일 폭우가 내리고 있다. 나는 비가 오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일 년 내내 거의 건조하고 뜨거웠던 이곳에 내리는 이 비로 말미암아 공기와 길거리가 청소되는 것 같아 마치 내 마음도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 물론 밤에 빗소리를 들으며 자는 잠은 최고의 숙면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인지와는 다르게 몸은 조금 이런 분위기를 불편해하는 것 같다. 뭔가 피곤하기도 하고, 소화도 잘 안되고, 가끔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도 든다.


오늘은 늦잠을 잤다. 밤새 내린 비 때문인지 어제 늦게 자서 그런 것인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9시가 넘어있었다. 샤워 후에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커피를 가지고 서재로 올라와 책상에 앉아 올 한 해 진행했던 내담자들과의 상담 관련 문서들을 정리하고 있다. 파일을 보며 서류에 적힌 내담자들의 이름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얼굴과 고민들, 그리고 그 사람과 나눈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


'내담자 A, 음...... 딸의 탈선 행동으로 고민하시던 분인데...... 나름 잘 해결되었었지. 지금은 잘 지내시려나?'

'내담자 B, 우울증이 심했고 트라우마로 인한 영향도 꽤 있었던 분인데, 증상이 조금 호전되자마자 이사를 가시는 바람에 상담이 멈췄지. 어떻게 지내시려나?'

'내담자 C, 남편의 사별로 인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삶에 찾아온 혼돈과 도전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던 분인데...... 새해에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이런 식으로 파일을 볼 때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도 나와 여전히 상담을 진행 중인 내담자들도 있고, 상담이 종료된 케이스들도 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단한 것을 해준 것은 아니더라도 나와의 상담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돌더미에서 돌 하나라도 제거가 되었다면 다행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비 오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하늘에서 나의 내담자들이 마치 단체 사진 찍듯이 모여서 있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들은 웃고 있었는데, 그 얼굴들은 그들의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보였다. 소년과 소녀들의 모습이었다. 마치 그들도 어린 시절에는 아무 걱정과 마음의 얼룩 없이 행복하게 지냈다는 것을 누군가가 내게 보여주기라고 하듯이 그렇게 그 모습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원형(Prototype)이라고 했던가? 나는 우리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원형이 있다고 본다. 그 원형은 정체성보다 더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그 사람의 자아성으로 단순한 유전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다양한 경험 등이 온전히 맞물려 소년 소녀 시절에 거의 완성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원형 위에 마치 러시아 장난감 마트료시카처럼 조금씩 더 큰 그 사람이 덧입혀져서 성인으로서의 지금의 내가 되며, 지금의 나도 매일, 매달, 매년 새로운 껍질을 덧입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 무엇보다 고귀하고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의 몸은 늙어도, 사람의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내담자들은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이가 60이 넘은 내담자도 순간적으로 마치 12살 소녀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것은 내가 그 분을 굳이 그렇게 보려고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그 분 안에 있던 '내적 아이'(Inner child)가 여전히 성인으로서의 자아와 교류하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찰나의 증명 같은 현상이다. 가령 완벽주의적 기질이 강해서 일과 성과에 집착된 채 살아온 내담자에게서는 어린 시절 부모님께 인정을 받고자, 그래서 부모님의 질타를 피하고자, 그리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싶어 하는 여린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술중독과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내담자에게는 어린 시절 일터에 나가 늘 밤에 돌아오던 부모님을 기다리며 혼자 어두운 방에서 울며 부모님을 기다리던 눈물과 콧물로 얼룩진 얼굴의 소년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칼 융(Carl Jung)이 제안한 '상처받은 내적 아이' (Wounded inner child)의 아이디어는 그 의미와 효과가 분명하다고 본다.



그래서 '내적 아이 치료'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어져 왔으며 관련 서적도 많이 출판되었다. 그 방법은 저자와 연구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은 틀은 같다. 간단히 말해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 그 아이와 다시 연결된 상태에서 그 아이를 달래주고 격려해 주고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어른인 내가 도와주며 해주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생각보다 똑똑하고 섬세하며 약하다. 경험과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억누르거나 횡포를 부리며 악행을 하거나 악담을 퍼부으면 그것을 분별하여 처리하는 데 있어서 역부족이다. 지혜와 경험, 그리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어른이 '넌 제대로 하는 것이 없구나'라고 다른 성인에게 말하면 그 성인은 그 말을 타당성이 없는 말로 판단해서 무시해 버릴 수 있지만, 그 말을 어떤 아이에게 하면 그 아이는 그 말을 가슴에 담고 (내면화) 자신이 정말 그런 아이라고 믿게 될 확률이 크다. 아이가 트라우마를 겪거나 어른들에게 안 좋은 말을 들었을 때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접수하고 마음 속에 내면화하기 쉽기에 어른들도 모르게 아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타당성이 없는 말이거나 해로운 경험 인줄도 모른 채 마음 속에서 그대로 그 싹을 틔어나간다. 그래서 그런 싹의 영향력이 어른이 된 후에도 남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인들은 자신이 특정한 부분에 대해 열등감, 공포, 심한 걱정, 불편한 느낌을 갖는 것은 알아도 왜 그런 것들을 갖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고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담자들과 내적 아이 치료를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나의 경우 내담자의 상황과 문제, 그리고 내담자의 증상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진행을 하지만 대체로 몇 가지 공통된 틀을 가지고 내적 아이 치료를 진행한다. 그 순서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당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그 아이와 만나서 재연결되어 보세요(Reconnect with your childhood)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 그 장소로 간다고 상상하고, 그 아이를 만나서 감정적으로나 인지적으로 재연결되는 과정을 도와줌


2. 나는 당시 어떤 타입의 아이였는지 생각해 봅시다(Identify the type of your  inner child)

나는 어떤 아이였나요? 나는 무엇을 하면 즐거웠고, 무엇 때문에 화가 나거나 슬퍼졌나요?

나는 주로 슬펐나요? 버려졌다고 느껴졌나요? 불안했나요?

나를 그려보거나 옛날 사진을 봐도 좋습니다

 

3. 나의 몸과 마음 상태를 살펴봅니다(Pay attention to your emotions or feelings/Do a body scan)

어린 나를 마주하며 다정하게 물어봅니다.

"긴장을 풀고 편하게 앉으렴"

"무엇을 하고 싶니? 무엇을 원하니?"

"지금 기분이 어떻니? 안 좋다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니?"

"삶에 지속적으로 생기는 어려움이나 고민이 뭐니? 너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니?"

"주로 느끼는 감정에 대해 자세히 말해줄래? (예, 약한 자아, 거절당한 느낌, 수치심 등)

"몸에 불편한 느낌이 드는 부위가 있니?"

 

4. 아이와의 대화를 종이에 받아 적어봅니다. 아이에게 편지를 보내봅니다 ( Write it down on the paper/Send a letter to the child)

아이에게 구체적인 질문을 하며 그것을 종이에 받아 적고 기록합니다. 질문으로는

'지금 기분이 어떻니?'

'내가 무엇을 도와줄까?'

'내가 뭘 해주면 좋겠어?'

등이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만약에 아이가 대답하기 싫어하면 너무 억지로 대답하게 하지 말고 그냥 같이 있어주면 됩니다. 대화 후에 아이를 위해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5. 치유 명상을 한다 (Healing Meditation)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지금/여기(here and now)'에 집중하며 명상을 합니다.

이 때 내가 그 아이 본인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의 감정과 느낌, 그리고 생각을 그대로 느껴봅니다.

그리고 서서히 무엇이 그 아이의 감정과 생각을 가로 막고 있는지 파악해 봅니다. 예를 들어, 엄한 부모님 때문에 자유롭게 감정이나 고민을 표현 못해온 아이라면 얼어붙어 있는 그 마음을 느끼고 이해해 봅니다.

실전에서 저는 주로 두 가지 명상을 사용하는데 (Loving-kindness meditation 또는 Visualization meditation) 이런 명상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원하시면 인터넷에서 검색하시거나 관련 서적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6. 아이를 격려하며 힘을 주기 (Strengthen and encourage your inner child)

아이가 받은 상처와 그로 인한 왜곡된 생각들 (예를 들어 '나는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아이야')을 파악하고 교정해 줍니다 (예, "너는 이미 많은 것을 제대로 해냈잖아. 앞으로도 그럴 거야"). 주눅 들어있거나 감정적으로 단절되어 있는 아이를 꼭 안아주고 격려해 줍니다.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와 예시들을 들어주면 더 좋습니다. 그리고 공감하며 이해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예, "아, 참 슬퍼겠구나")

 

7. 그 아이를 사랑하고 받아들이기 (Accept the child and show your self-love for the child)

일단, 그 아이에게

'너는 나와 함께 하면 안전하다'

'내가 널 보살피고 지켜줄 거야'

라는 생각을 느끼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원하는 타입의 어른이 있고 그 아이가 그 어른이 자신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행동이나 말이 있을 텐데, 이제 그 아이에게 어른으로서 그것들을 해주시면 됩니다. (예, 상상으로 같이 놀이동산에 가서 노는 장면을 떠올린다든지 같이 야구를 하는 장면을 떠올린다든지 하시면 됩니다)

 

8. 그 아이에게 재확신을 해주며 격려하고 긍정적인 기운을 주기(Give re-affirmation for the child)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그 아이의 감정적, 인지적, 또는 다른 문제들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며 다시 격려하고 그 아이가 독소 있는 감정과 왜곡 등을 완전히 털어버릴 수 있도록 재확신을 주는 대화를 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정직하게 편하게 그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도록 그 자유에 대한 권리를 재확신 시켜주고, 스스로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 수 있도록, 타인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줍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혼자 끙끙 고민하지 말고 주변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소통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줍니다.



내가 보통 사용하는 내적 아이 치유 틀은 이렇다. 이 방법을 통해 나름의 효과를 본 내담자들도 꽤 있다. 어떤 내담자들은 울기도 했고, 어떤 내담자들은 자신의 어린아이와 깊이 교류해서 마치 최면에 걸린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어떤 내담자는 어릴 적에 그토록 외로웠던 자신이 아직도 자신 안에 있고 그런 7살의 자신을 위해 자신의 현재 7살 된 아들이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최근에는 시간이 날 때 어린 나 자신과 이런 식으로 교류하며 대화를 하기도 한다.



정말 내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또는 사후 세계에서 내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있는 자유가 허락된다면 나는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길을 걷거나 놀이터에 앉아 있는 나를 만나  소년과 함께 지내고 싶다. 나는  소년의 감정과 경험, 그리고 문제 등을 이제 성인으로서 너무  안다. 그리고 무엇을 하면  소년이 즐거워지고 웃음을 짓게 되는지도 당연히 안다. 어린 시절 내가 돌아다니던 지역의 모습과 가게들, 내가 종종 먹던 먹거리들, 같이 놀던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만일 내가 1989년으로 가서 소년 시절의 나를 만나면 일단  아이를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음식인 짜장면을 사주고, 함께 자주 가던 동네 공원에 가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없던 작은 공원이었지만, 나는  공원을 좋아했었다.



내년에는 또 어떤 내담자들을 만나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도 된다. 그리고 그 내담자들의 안에 있는 그들의 내적 아이들도 어떤 이야기와 사연, 감정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 아이들에게 나의 호기심과 존중, 그리고 친절함을 보인다면 그 각각의 아이들과 연결된 성인인 내담자들도 인생을 새로운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보다 건강한 태도로 삶을 해석해 나가게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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