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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게 가깝거나, 서운하게 멀거나

우리는 왜 적당한 거리를 찾지 못할까

by 갓진주 Feb 24. 2025


초밀착 관계


어릴 적 나에게 사람들과의 관계는 마치 색색깔의 보물을 모으는 것처럼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다.


친구와는 점심으로는 뭘 먹었는지 새로 산 폰케이스 디자인까지... (과장을 조금만 보태자면) 깨어있는 모든 순간을 나누고 싶어 했다. 


연인과는 하루에도 수십 번 통화하고 수백 번의 카톡을 주고받았다. "지금 뭐해?", "밥은 먹었어?", "잘 자" 같은 일상의 모든 순간을 확인하고 싶었다. 가족들과는 숨 쉬는 공기마저 나누며 살 정도랄까. 


다이어리의 모든 칸은 누군가와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많았고, 그 자체로도 너무 행복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진정한 관계라고 믿었다.



가까운 사이의 무게감


창 너무 가까이 붙으면 김이 서리듯, 사람과의 관계도 그러했다. 숨 쉴 틈 없이 가까워질수록 서서히 불편함이 번졌다. 처음에는 먼지처럼 사소한 것들이었다. 습관적으로 입술 각질을 물어뜯는 모습, 커피숍에서 다른 손님들을 불편하게 할 만큼 큰 목소리로 말하는 버릇, 약속 시간에 늦어져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느긋함까지. 하나둘씩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매일 보는 얼굴도 어째서인지 더욱 낯설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낯선 카페 주인과 나누는 짧은 대화가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오늘은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라는 말에 "날씨가 쌀쌀하니 따뜻하게 드릴까요?"라고 묻는 그 잠깐의 대화가 주는 편안함.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운 이들과의 만남이 가장 큰 부담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할 때,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물감 자국만 보이다가 한 걸음 물러서야 비로소 전체 그림이 보이는 것처럼.



왜 이렇게 됐을까?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기대라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야"

"이번엔 먼저 연락해 주겠지"

"특별한 날인데 뭔가 해줄 거야"

"내가 이렇게 챙겨주는 만큼 나도 챙겨주겠지"

이런 기대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도 모르는 사이 산더미가 되어있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예언자』칼릴 지브란 작



거리두기


사진을 찍을 때 초점 거리라는 게 참 중요하다. 모델과 너무 가까우면 모공부터 잔주름까지 다 보여서 부담스럽다. 그런데 또 너무 멀면 표정을 잘 알아볼 수가 없다. 


관계도 예쁘게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나이가 들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미묘한 균형점을 찾는 것, 그것이 관계의 기술일까.


나는 이제 조금씩 배워간다. 

'기대'라는 무게를 내려놓는 법을. 

상대방의 모든 순간을 공유하지 않아도, 모든 감정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선명하게 만든다는 것. 




서로의 성장을 돕지만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에리히 프롬이『사랑의 기술』에서 말한 것을 이제는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거리 좁히기


너무 가까우면 숨 막히지만 또 막상 멀어지면 서운해지는 것이 사람이다. 숨 막히지 않도록 거리를 조정해 놓고 또 괜스레 울적해지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의 문제일지 모른다. 끊임없이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 그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을 잃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이들과의 관계도 건강해진다는 것을. 다른 사람과의 거리는 적당히 유지하고 나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 


마치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림이 덜하듯, 자신의 중심이 단단한 사람은 관계가 요동쳐도 쉽게 동요하지 않게 된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과 진정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이제 나만의 정원을 가꾸어 간다. 그곳에서 피어난 꽃들을 때론 혼자 즐기며 때론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다. 적당한 거리는 결코 멀어짐이 아닌, 서로를 더 선명히 바라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사람에게 사람이 필요 없는 게 아니다. 

다만 필요 이상의 기대로 서로를 숨 막히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관계의 시작일지 모른다. 


마흔 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볼 때, 서로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리가 외롭지 않도록 우선 나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길은 잃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관계 의존적인 사람은 은은하게 불행하고

자기 자신을 아끼고 돌볼 줄 아는 사람은 묵직하게 행복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브런치 글 이미지 1


관계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 근데 이미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어진 사람들은 어쩌지?

참, 인간관계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일단 급한 대로 내 마음의 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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