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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는 없어도 돼

by 백승권 Mar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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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을 둔다면

지금은 어떤 시간일까

다음 시간은 예정되어 있을까

지금의 정의에 따라

정해지는 걸까

너무 깊을까 아님

아직 멀었을까

도착하면 어떤 모습일까

어떤 대화를 할까

어떤 표정으로

어떤 문장으로


한때는 지금을 정체라고 여기기도 했어.

멈춤이라고 퇴화의 조짐이라고

균열과 붕괴의 시작이자 멸망의 도래라고

나도 그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다가 홀로

무너지는 천장과 함께 사라질 거라고


확신은 휘몰아치는 비바람 앞에 성냥불 같았고

불안은 폭발하는 정유공장의 화염기둥 같았어

지금은 달라졌어. 나는 여전히 안에서

어둠의 벽을 더듬고 있고

내부의 빛은 틈 사이에도 태어나길 거부하고


누군가 언젠가 밖에서 돌을 꺼내어

바깥의 빛으로 잡아당겨 꺼내 준다면 또는

앤디 듀프레인처럼 닳고 닳은 수저로

벽을 파내어 굴을 만들어 수십 년이 걸리는

탈옥 계획을 세운다면 이런

무채색의 희망으로도

컬러꿈을 꾸며 웃을 수 있지.


지금의 우리와 이곳의 나는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고.


남은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스케치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여길 수 있겠지.


이런 밝은 생각에 익숙하지 않아서

주파수가 잡히지 않는

라디오 채널처럼 문장이 깜빡거린다.

커다랗고 복잡한 가방을 뒤적여

배터리가 영원한 랜턴을 찾아내어 입에 물고

여기까지 온 지도를 펼치고

다음 약속한 장소까지 선을 그려서

여기의 바깥 지점이 그려진 곳까지 선을 잇고

상상과 행동을 실행하는 거야.


속삭여도 들을 수 있어

생각은 공유될 수 있고

심장만 크게 뛰어도 감지할 수 있지.

여긴 너무 적막하고 바깥의 누군가는

벽에 귀를 대고 있어서 소리와 떨림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시간의 속도가 다를 수 있어.

바깥과 내부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것 같지만

각자 다른 우주로 둘러싸여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니 그럴 테니까.


하지만 과거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빠져나오면

그동안의 시간은 어떻게든

다르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

그동안 공유된 기록을 의지하며

우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똑같은 기억을 같은 디자인의 상자에 저장해 둔 채

어둠과 침묵과 정지의 현재를

빛과 소리와 움직임의 미래로

끊임없이 돌려놓는다.


계약서는 없어도 돼.

여긴 그런 세계가 아니고

보이는 약속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기억을

영원히 살려둘 테니까.


인간은 나약하지만

어떤 대화의 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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