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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 Sep 04. 2024

나도 같이 죽을랍니다 #1

1. 카드 한 장 가입해 줄래요?

안녕하세요? 이하입니다.


오랜만에 본업(?)인 소설 연재로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수, 토요일 9시에 장편을 연재할 예정이며 제목은 <나도 같이 죽을랍니다> 입니다.


간단하게 내용을 설명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천 무의도의 한 방갈로, 그곳에서 인터넷 자살카페로 알게 된 세 남녀가 모인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그들과 엮인 한 청년(석정)이 대열에 합류한다. 처음에는 같이 죽으려고 했던 석정은, 마음을 돌려 그들을 살리기로 하는데... "어차피 인생 쫑난 거, 제대로 복수하고 죽는 건 어때요?" 그 말에 혹한 이들은 힘을 모아 서로의 복수를 완수하고 같이 죽기로 결심한다. 과연 그들은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을까? 삶의 벼랑 끝에서 동반자살을 하려는 사람들, 그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히든카드'가 된 네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언인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지 돌아보고자 한다.


삶에 큰 회의를 느끼고 자살여행을 떠난 네 남녀의 이야기지만, 가볍고 유쾌하게 읽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공교롭게도 네 명의 남녀에게는 제 모습도 조금씩 들어가 있는데요. 먼저 등장하는 주인공 이석정의 경우, 카드모집 영업을 하는데, 사실 저도 취준생 시절에는 생계를 위해 카드모집, 보조출연을 비롯해서 안 해본 일이 없는데요.


그런 면에서 석정이 등장하는 장면은, 자전적인 에세이로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그럼 앞으로 수, 토요일 9시에 뵙겠습니다!




서울 연건동의 한 제약회사 건물에 들어섰다.


눌은밥을 끓여 먹고 나와선지 속이 헛헛했다. 빌딩숲을 헤치려면 칼로리 소모량이 많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이 회사 건물에는 잡다한 회사들이 층층이 섞여 있어서 입구에서의 보안이 허술했다. 맨 꼭대기는 13층이고 제약회사는 10층부터 13층까지 들어섰다. 잽싸게 안쪽으로 들어선 나는 승강기 버튼을 눌러놓고 딴청을 피웠다. 매월 달삯을 받는 월급쟁이가 모였으니 카드신청을 받기에도 수월할 것이었다.


- 띵동


잠시 후 승강기 문이 열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닫힘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승강기는 곧 문을 닫고 상승하기 시작했다. ‘끽끽’하는 도르래 소리가 들리자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승강기가 올라갈 때마다 점멸하는 숫자들을 보았다.


한때는 이런 건물에서 일하는 화이트칼라가 되고 싶었다. 반짝거리는 쥐색 정장에 네모반듯한 서류가방을 들고 고개를 쳐든 채 대리석을 가로지르는 일. 엄마도 그런 자식의 모습을 얼마나 선망했던가. 하지만 새로 쓰거나 덧쓴 이력서와 자소서가 100장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아예 취업을 포기했다. 당장 써야 할 생활비가 급했고 무슨 일이든 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처음 신용카드 모집인이 되겠다고 광화문 소재 한 카드사의 2층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영업 관리자인 구 팀장은 내 외모를 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카드 모집인이라기보다, 도박꾼 같네.”


구 팀장은 손을 저으며 돌아가라고 했다.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머리를 단정하게 깎았고, 동대문종합시장에서 싸구려 쥐색 양복도 한 벌 사 입었다. 한 번도 면접을 본 적이 없지만 신입사원답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까지 다시 써서 제출했다. 서류를 일별하던 구 팀장이 시큰둥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도박 한 번 걸어볼까?”


그때부터 내 꿈은 조커로 바뀌었다. 조커처럼 무엇이든 해결해 내는 광대가 되리라. 화이트칼라보다는 블랙칼라가 훨씬 멋지지 않은가. 자괴감보다는 뿌듯함이 앞섰다.


- 띠링


‘13’이란 숫자가 반짝이며 승강기 문이 열렸다. 꼭대기 층에 도착한 나는 유리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지금 시간은 오전 9시 반, 한참 업무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라 그런지 좀처럼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후우, 한숨부터 내쉬고,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서서 옷매무새를 고쳤다. 앞머리가 짧아선지 펑퍼짐한 이마가 그대로 드러났다. 언젠가 국립중앙박물관서 열린 마야문명 특별전에서 본 조형물이 떠올랐다. 부족의 얼굴을 빚은 조각품이었다. 얼핏 보면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반가사유상처럼 후덕한 얼굴을 지녔다. 그러나 편편하고 길쭉한 이마가 도드라졌다.  


“옥수수가 중요한 나라여서 옥수수신을 숭상했다지요?”


초등학생들을 인솔하고 온 교사가 스마트폰을 두드리며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어마, 그 여자는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실제로 갓 태어난 몇몇 아이들의 머리에 무언가를 덧대어 자라나면서 머리가 옥수수처럼 변형되게도 하였다니…”


여교사는 울상을 지으며 옥수수신한테서 돌아섰다.


“실로 잔인한 부족이 아닐 수 없구나. 마야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을 위해 아이들의 머리에 족쇄를 채웠어. 태국의 어느 부족은 긴 목이 미추의 기준이라 하여 목에 긴 틀을 채웠고. 중국인들은 같은 이유로 여자의 발에 전족을 채웠단다. 차라리 몸의 한 부위만 옭아맨 것은 양호한 경우야. 늙은 왕이 죽을 때마다 가야인들은 아예 산사람들을 석곽에 껴묻었으니까!”


나는 가만히 반투명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네모난 얼굴에 평평한 이마를 가진 남자가 보였다. 누가 이렇게 빚다가 말았을까. 모서리도 다듬지 않고. 그건 우리 집안 내력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얼굴은 차라리 레고 인형에 가까웠다. 애니메이션 <업>에 나오는 칼 할아버지 같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철근 사이를 척척 잘도 오갔고, 벽돌도 한 번에 수십 개씩 지고 올랐다. 차이가 있다면 진작 지붕 위에 풍선을 잔뜩 매달아 놓지 않고 하늘을 날아올랐다는 것. 그 이후로 엄마도 빌딩 청소부 일을 그만두었다.


수돗물을 틀어놓은 채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마른세수를 했다.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크게 뜬다. 때마침 누군가 화장실에 들어서서 소변을 누기 시작했다. 두 눈에 힘을 주어 깜빡였다. 혹시 나를 잡상인 취급할까 가슴이 뛴다. 남자는 볼일을 마치고 내 뒤에 선다. 나는 손 터는 시늉을 하며 옆으로 비켜선다. 남자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손에 물을 묻힌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듯이 휴지 한 장을 뽑아 물기도 안 묻은 손을 닦는다. 남자도 휴지를 뽑아 손을 닦는다. 나는 애꿎은 이마까지 휴지로 훔친다. 누런 휴지가 기름종이처럼 번들거린다. 남자는 휴지를 뭉쳐 통에 던지고는 밖으로 나선다.


‘지금이다!’


나는 남자의 뒤를 재빨리, 그러나 사뿐히 뒤쫓는다. 남자가 유리문 앞에 서서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을 오른쪽 보안키에 댄다. 삐 소리가 나며 유리문이 양쪽으로 열린다. 남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다. 유리문이 닫히기 전에 나도 안쪽으로 따라 들어선다.


‘진입 성공!’


나는 주먹을 쥐어 흔들며 스스로에게 다음 명령을 내렸다. 이 사무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카드 가입을 제안할 것.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암기한 스크립트대로 대화를 진행할 것. 미리 준비해 둔 사은품 도록을 빠르고 은밀하게 제시할 것. 되도록 자세와 목소리를 낮추어 파티션 옆으로 멘트가 흘러나가지 않게 할 것. 얼굴표정은 최대한 밝게, 목소리는 나긋나긋, 눈빛은 슈렉 고양이처럼 초롱초롱! 오른쪽 끝에 자리한 팀부터 카드모집을 권유하기로 했다. ‘인사팀’이라고 써 붙인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가장 안쪽에 자리한 사람은 인사팀장이겠지. 나는 그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명함을 건네며 낮게 속삭였다.


“한국카드에서 나왔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꼭 가지고 있어야 할 재테크 카드, 쓰시는 족족 적립되는…”


햇살이 안경알에 반사되어 인사팀장의 눈알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런 경우는 외운 스크립트 그대로 밀고 나갈 것.


“적립 카드, 통신업종 10%, 대중교통업종 10%, 주유업종도 리터당 60원을 할인해 주는 카드랍니다.”

“필요 없습니다.”


인사팀장은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샌님 같아 보이는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고객이 한 번 거절하면 또 한 번 권유할 것. 큼큼, 헛기침을 하며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조금만 더 쓰시면 음식점, 커피전문점, 약국, 편의점 업종까지 10% 할인된답니다. 하핫.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가 아닐 수 없지요.”


샌님은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슬슬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일까. 좀 더 피치를 올리기로 한다. 이번에는 사은품이 그려진 도록을 펼친다.


“명품 카드 만들고 명품 받아 가시는 겁니다. 하나 골라보세요. 첫 번째는 스위스 명품 여행가방, 브랜드 로고가 찍힌 은색 바탕이 아름답지요? 두 번째 역시 스위스 명품 시계입니다. 세 번째는 독일제 오븐 토스트 기기예요.”

“필요 없다니까요.”


샌님은 신경질을 내면서 소리를 높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찔러보고 또 거절을 하면 물러서야 한다. 너무 들이대면 쫓겨나거나 해코지를 당하는 수도 있다. 나는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카드 가입하시면 재테크도 되고 명품도 공짜로 생기고, 일석이조 아닙니까?”

“이거 왜 이러십니까?”


샌님이 언성을 높이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자 사원 둘이 벌떡 일어나 내 뒤로 다가섰다. 남자 사원은 각각 양쪽에서 내 팔을 하나씩 움켜쥐었다. 사무실에서만 일해서 허약체질인 줄 알았는데 둘 다 아귀힘이 드셌다. 만날 키보드를 두드려서 그러나.


“끌어내.”


샌님은 차가운 목소리로 사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인사 팀장답게 냉정한 처사였다. 저런 식으로 회사에 더 이상 필요 없는 사람들을 내보내거나 지방발령을 내기도 하겠지.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남자 사원 하나가 내 팔을 꽉 잡았다. 어찌 됐든 지금 나는 잡상인이고 난동을 부리고 있는 샘이었다. 괜한 오기가 일었다.


“통신료 자동납부 신청만 해주셔도 통신비용이 5%나 추가할인 되세요.”


남자 사원 둘은 아예 양쪽에서 내 팔짱을 낀 채 힘을 주었다. 짧은 순간 두 다리가 살짝 들렸다. 나는 허공에 뜬 채로 아등바등 발을 굴렸다. 유리문이 열렸고 나는 밖으로 내쳐졌다. 연락을 받았는지 승강기 앞에 경비원이 서있었다.


“이런 인간은 처방이 없네.”


제약회사 경비원은 쓰는 용어도 달랐다. 나는 순순히 인계되었고, 1층 로비에서 얼마간 심문을 당했고, 이윽고 회전문에 껴묻혀 뱅뱅 돌았다.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한참 돌았다. 경비원이 쫓아와서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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