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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 Sep 30. 2022

#5 서울과 헤어질 결심

자연이 내게 가져다준 것들

산동네에서 보낸 37년



'그러나 서울이 아니라면 어디로 가야 하지?'     


어릴 때 가난 때문에 잠시 시골의 할머니 댁에 맡겨 자랐을 때 빼고는, 한 번도 서울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나는 성곽이 즐비하게 늘어선 달동네와 산동네를 오가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서른 즈음부터는 좀 더 내려와 이화동에서 살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가까운 동네에 살았기에 힘든 점도 있었지만, 좋은 점도 많았다. 복잡한 도심 안에서도 성터가 있는 낙산은 자연에 더 가까웠기에, 나는 날마다 개구멍을 통해 철망이 드리워진 성터를 드나들며 친구들과 함께 풀꽃이 가득한 길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때는 형광등 스위치가 천장에 붙은 형광등의 줄에 붙어있었기에, 삼남매는 늘 어둠 속에서 쭈그리고 앉은 채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별과 달이 가까운 동네였기에, 우리는 종종 문 앞에 나가서 쭈그리고 앉은 채 풀을 뽑거나, 풀벌레를 쫓았다.     


그러다 보면 아버지가 장사 일로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야쿠르트 배달을 하던 어머니가 밥때를 넘겨서 퇴근해도, 배고픔도 그리움도 잊고 풀을 잔뜩 뒤집어쓴 채 쓰러져 잘 수 있었다.     


부모님이 서울에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할 때까지, 한두 해 정도 충청도 옥천의 할머니 댁에 맡겨자란 나와 둘째는 처음에는 서울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모든 것이 빨랐고, 모든 것이 급했다. 친구들을 사귀기도 버거웠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품어준 것이 바로 산동네였다. 낙산은 오히려 내게 비밀 정원이 되어주었고, 그 속에서 만난 이름 모를 풀꽃들과 곤충들은 내 감수성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조선 시대의 흔적이 남은 성곽들은 역사적인 상상력을 갖게 해주었고, 지금은 목동으로 이전했지만 성터의 끄트머리에 자리했던 이화대학병원의 영안실은 학생들에게 하나씩 '무서운 이야기'를 짓게 만들었다.     


어쩌면 나는 그곳에서, 자연이 주는 무한한 위로를 받으며 이야기를 상상하고 만드는 연습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정작 전교에서 손에 꼽는 등수를 갱신하는 동안에도(물론 끝에서부터) 나는 책에 빠져 살았고, 청소년기를 보내면서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찌나 책을 많이 읽었는지, 대학 재학 중에는 뜬금없이 도서관에서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순전히 책을 많이 빌렸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 덕분에 졸업할 즈음에는 문예지를 통해 시로 등단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 시에는 자연보다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빈부의 문제나 사회 문제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연스레 돈을 많이 버는 것과, 부를 축적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나는 점점 더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시를 통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더 드러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시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 리얼리즘을 추구하던 시들이 저물고, 소위 '미래파'라고 불리던 모던하고 감각적인 시를 쓰는 시인들이 주목을 받던 시기였다. 


나 역시 그런 시를 좋아했지만, 아쉽게도 내게 그런 감각은 없었다. 나는 한동안 시를 쓰지 못했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곧바로 취업 전선으로 내몰렸다.     


한동안 학원강사 생활을 하다가, 서른이 되면서 드디어 한 중견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는데, 그때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회사가 바로 내 작가 생활의 주춧돌이 되어준 교보문고였다.      


내가 합격한 부서는 독서홍보팀이었다. 교보문고는 문화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인만큼 복지도 좋고 근속 기간도 높아 취준생들 사이에서 준공기업이라 불릴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국내외의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기업의 꽃이라 불리는 홍보팀에선 단 한 명을 뽑았는데, 나중에 듣기로 지원한 숫자만 무려 1,800여 명에 달했다고 하니, 말 그대로 경쟁률이 1,800대 1이 되는 셈이었다. 바로 그런 곳에 합격하게 되었으니, 스펙이나 재능 여부를 떠나 그저 인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인연은 퇴사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즈음 회사 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바로 내가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지극히 간단한 깨달음이었다.      


부모님께서 그토록 어렵게 돈을 버셨던 것은, 돈을 못 버신 게 아니라 돈을 벌어서 우리 삼 남매를 다 키워낸 것도 모자라 대학까지 졸업시키느라 허리가 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을 탓하기보다, 새로운 환경을 창조한다는 것을 막상 내가 홍보와 교육을 하면서 돈을 벌어보니 알게 된 것이다.     

그제야 나는 철이 들기 시작했다. 철이 들면서 못 보던 것들이 눈에 보였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어서, 돈에 끌려다니는 게 아닌,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내집마련을 하고, 경제적 자유를 이루어야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때부터 나는 오직 그 꿈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선택이 나를 더 많은 글을 쓰게했고, 더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흔 넷이 된 지금, 나는 또 다른 선택 앞에 놓여있었다. 파이어족이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 경제적 자립을 일구어 조기은퇴를 하려는 사람들 일컫는 말이라면 딱 지금의 내가 바로 파이어족인 셈이었다.     


나는 다시금 어디로 이주할지를 생각해보았다.      


자연 속에서 자란 경험 때문에, 나는 일곱 살 난 아들이, 이제는 더 복잡해진 서울보다는 마음껏 자연 속에서 뛰어놀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기를 바랐다. 


학원과 진도에 쫓기는 빽빽한 학교보다는 시골학교에서 여유롭게 지내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아토피와 비염에서도 좀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다. 


자연스레 우리는 강원도나 제주도를 염두에 두기 시작했고, 어느 시점부터는 제주, 그것도 서귀포에 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 셋은 곧바로 여행가방을 꾸렸고, 먼저 살곳을 알아보기 위해 제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금은 한성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성곽길이 조성된 낙산. 


낙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데, 조선 시대에는 이곳에 타락청, 즉 소의 젖을 짜고 우유를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나니, 나 역시 어쩌면 이곳에서 자연의 젖줄 덕분에 성장할 수 있지 않았나 싶었다.  


서른 일곱에 결혼하면서 이곳을 떠났고, 부모님도 머지않아 이사를 했다. 그 때문인지, 낙산 성터길만 생각하면 가슴이 짠해진다. 


언젠가 제주에서 아들과 올레길을 다 걷고 나면, 서울로 와서 같이 성곽길을 걷고 싶다. 


"아빠가 말이야. 너처럼 어릴 때 여기서 친구들하고 뛰어놀았어. 숨바꼭질도 하고, 달리기 시합도 하고."  


그러면 아들은 틀림없이 아빠가 평소에 하던 말을 흉내내며 이렇게 답하겠지.


"저기 올라가면 위험해. 큰일 날 소리!"


앞으로는 아이를 좀 더 풀어놓고 키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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