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생애 첫 마라톤에 출전하게 되었다. 나는 단순 운동이 몹시 지겹다. 달리기나 수영, 자전거 타기, 줄넘기와 같은. 세상에 얼마나 재미있는 운동이 많은데 앞을 보고 달려 나갈 필요가 있는가. 그런데 음성군에서 열리는 반기문 마라톤에 음성군 유튜브 기자로 촬영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마라톤이 시작되기 수개월 전, 마라톤 코스를 미리 차로 한 번 돌아보며 촬영 했다. 음성군의 마라톤 코스는 저수지를 끼고도는 길로 오르막 내리막이 심하지 않고 공기가 좋고 풍경이 몹시 예쁘다. 원래 시골길이란 조금만 걸어도 좋은데 42km를 내리뛴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마라톤 코스를 취재하고 난 다음 나는 마음을 굳혔다. 나도 참가를 해보기로 말이다. 물론 42km 풀코스를 신청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프도 아니다. 백번 양보한 10km도 아니었다. 내가 신청한 건 5km 코스였다. 이 말을 들은 체대 나온 친구들은 5km면 걸어서도 한 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거리 아니냐며 놀렸지만 나는 재밌자고 참가한 마라톤 대회에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 사는 친구를 두 명이나 섭외했다. 음성의 마라톤 코스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 아냐며. 물론 그건 42km를 다 뛰었을 때 얘기지만 초반만 뛰고 돌아와도 눈이 즐겁고 마음이 상쾌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나의 사탕발림에 친구들은 넘어왔다. 우리 셋은 마라톤을 준비하며 나이키 러닝 앱을 깔아 서로 연습하는 걸 의식하고는 했다. 참가비는 단돈 만 원.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마라톤 티셔츠 한 장과 번호표가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나는 마라톤을 참가하기 바로 전날 까지도 내가 왜 굳이 고생을 사서 하려고 이걸 신청했을까,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서 노닥거리며 놀면 참 좋을 텐데. 운동복 챙겨 입고 운동화 끈 질끈 매고 만나는 꼴이라니. 이만 저만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일 날 아침.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음성군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도시만큼 주차난이 심할 리 없다. 여유 있게 주차를 하고 행사장에 도착하니 바글바글한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오랜만에 시골에서 마주한 붐비는 풍경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 초등학교 때 느껴본 가을 운동회 같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의 체육대회 같기도 하고. 주최 측에서 제공한 밝은 파란색의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스머프떼처럼 몰려 있었다.
‘타앙’
시작을 울리는 총성 소리에 42km 풀코스 참가자들부터 슬슬 시동을 걸고 뛰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왠지 모를 긴장감에 심장이 가볍게 쿵쿵쿵쿵 뛰었다. 원래 대회를 나가거나 시합에 가기 전에 극도로 긴장을 해서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는 편인데 그 느낌이 좋아서 일부러 시합장을 찾곤 했다. 이번 대회는 결과가 중요하지도 않고 그저 놀자고 달리는 것일 뿐인데 출발선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으니 또다시 습관적으로 심장이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5, 4, 3, 2, 1’
우리 차례가 왔다.
‘타앙’
나는 고삐 풀린 강아지처럼 뛰었다. 뛴다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조금 뛰고 나니 금세 숨이 가빠져 왔다. 종합운동장을 지나 도로를 달려 형성된 마을 입구를 지나니 구경하러 나온 어르신들이 파이팅을 외쳐주셨다. 생경한 풍경이었다. 마라톤 하는 행렬들 사이로 동네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구경하러 나와 있다니. 페이스 조절하면서 뛰다가 웃음이 터졌다. 한 할머니가 ‘누가 누가 잘 뛰나’라며 음정 박자까지 붙여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조금 지나니 큰 우퍼를 몸에 장착하고 '함께 천국을 가자'며 전도하는 사람 때문에 귀가 따가워 나도 모르게 돌아보게 되었다. 동네 마라톤 시간과 코스를 미리 알고 홍보하러 나온 열정이라니. 감탄이 나왔다. 마라톤 코스는 심심할 틈이 없었다.
하늘이 매우 맑은 날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볕 아래,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앞을 보며 달리고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온 가족이 출전한 팀도 있었고 커플임에 틀림없는 남녀가 서로 등을 떠밀어주며 일요일 아침부터 건강한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나와 함께 출발했던 친구들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졌다. 셋 중 내가 꼴찌였다. 카메라를 켰다 껐다 하며 신기한 구경거리 일일이 다 찍고 사람 구경 풍경 구경 하며 그저 즐겁게 내 페이스대로 달렸다. 결승점에 골인했는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뛰고 싶을 정도였다. 마라톤 완주 메달을 받고 친구들과 사진을 찍은 후 집에 가려고 하는데, 식사를 하고 가라는 방송이 나왔다. 운동장 한편에 마을 주민분들이 천막을 쳐놓고 잔치국수와 훈제달걀, 두부김치, 그리고 막걸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식혜와 아이스티, 커피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다 ‘공짜’였다. 공복에 5km를 뛰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 후루룩후루룩 먹는 국수의 맛이 그렇게 기가 막힐 수가 없었다.
이날의 마라톤은 시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시골의 인심이 듬뿍 들어간 맛있는 식사와 시골 사람들의 순박한 응원이 인상적이었던 시골 마라톤. 무리하지 말고 5km씩 5km씩 차례로 시골에서 하는 마라톤들을 찾아 하나씩 달려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