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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Feb 23. 2022

아빠도 무거운 것을 들면 무겁다

 친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해서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었다. 그중 유치원생 아들이 있는 한 녀석이, 아이 운동회에서 아빠들 달리기 시합하다 접질렸는데, 발목 인대가 파열되어 목발을 짚고 모임에 나왔다. 얼마나 애한테 일 등을 안겨주고 싶었으면 발목이 돌아가도록 뛴단 말인가. 지 학교 다닐 때는 체육시간에 저리 열심히 하지도 않았으면서. '달리기가 장난이냐' '스프린트를 하려면 최소한 며칠 전부터 몸 풀고 준비를 해야지' 친구들은 잔소리를 릴레이로 보탰다. 어릴 적 친구들이 원래 그렇잖은가. 좋은 소리 해주면 진짜 친구가 아니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 우리 아빠도 참 열심히였다. 빨간 다라이 그네에 올라 탄 나를 지고 엄마와 아빠가 양 옆에서 달리기를 하던 사진이 남아있다. 여섯 살 때였는데 옛날부터 그 사진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나는 그 순간이 아직 기억난다. 유치원 근처의 초등학교를 빌려서 꽤 큰 규모로 운동회를 했는데, 밤에는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노끈으로 만든 인디언 추장 옷을 입고 춤을 추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 나의 아빠도 그렇게 달렸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었던 아빠가 날쌔게 달려 골인하고 잇몸이 드러나도록 웃었다. 1등을 한 우리 아빠는 2등이랑 차이도 꽤 많이 났다. 30여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남아있는 잔상이다.

 옛날 유치원은 아빠들을 많이도 굴렸다. 어느 주말엔 아빠와 등산을 갔다. 엄마는 촌스런 초록색 도시락통에 김밥을 싸주었다. 등산에서 1등을 하면 유치원에서 만들어주는 조악하게 생긴 금메달을 준다고 했다. 내 눈엔 그게 너무나 예뻐 보였다. 아빠는 나를 어깨에 짊어지고 단숨에 정상까지 올랐다. 운동 하나는 자신하는 아빠였다. 우리가 1등이었다. 하지만 그건 팀플이라, 1등은 다른 팀에게 돌아갔다. 다른 친구들 목에 걸리는 금메달을 보고 나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우는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하던 젊고 기력 좋았던 아빠가 기억난다. 어릴 적 기억이 이렇게 많이 나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내가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4살 겨울의 첫 이삿날마저도 기억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빠가 노력했던 순간들이 다 떠오른다. 물론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아빠는 남모르게 애썼겠지만. 내 친구의 아들 녀석도 나중에 기억할까? 아빠가 자신의 운동회에서 달리다가 기브스까지 한 일을? 그래도 우리 아빠는 멋있게 1등 했는데 자빠져서 인대 늘어난 아빠는 좀 웃길 수도 있겠다. 뭐 어떠한가, 아빠와의 더없이 소중한 기억일 텐데.


 아빠들은 언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세상이 만든 '아빠는 슈퍼맨'이라는 프레임이나 아이들이 기대하는 '우리 아빠가 제일 세다'는 기대가 아빠의 최선을 더욱 부채질한다. 아빠는 최선을 다하면서 아닌 척 태연하게 군다. 숨이 턱까지 차도, 숨차단 말 한번 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우리 아빠는 딸 둘 아빠라 딸들이 크고 나서도 무거운 건 늘 아빠 몫이었다. 여행을 가거나 할머니 댁을 갈 때면 아이스박스고 옷가방이고 바리바리 서너 개씩이고 지고 드는 건 다 아빠 몫이었다. 아들 있는 집들은 아들이 곧잘 대신해주기도 하던데. 운전대도 아빠 대신 아들들이 많이 잡던데. 아들 딸 상관없이 내가 운전도 좀 잘하고 힘도 좀 센 딸이면 좋을 텐데 워낙 곱게 자라서 (과연?) 그러질 못했다. 운전도 삘삘거리고 무거운 거 좀 들면 손목 인대가 늘어나 버리니 물리적으로 크게 도움은 못 된다. 그래도 무심한 딸은 아니니 아빠를 챙겨야 할 때가 있으면 두 팔 걷어붙이고 아빠 편을 들려고 한다.

 아빠는 식구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하면 혹시 남들이 모자라게 느낄까 봐 맘 놓고 뭘 먹지 못한다. 그런데 엄마는 음식 남기는 것도 싫어하고 짠순이라서 음식을 딱 먹을 만큼만 시킨다. 어릴 적에는 발견 못했는데 20살이 넘어가지 그게 눈에 보였다. 아빠가 종종, 몇 입 먹고 젓가락은 놓은 후 입을 다시고 앉아 있었단 것을. 아빠랑 함께 먹을 때는 1인분씩 그릇이 따로 나오는 걸 시키거나 여럿이 함께 먹을 땐 4명이서 6인분 정도는 시켜야 아빠가 마음 놓고 처음부터 먹을 수 있는 거란 걸. 그것도 처음에는 우리 밥그릇에 자꾸 뭘 올려주다가 어느 정도 우리가 먹는 속도가 느려지면 그제야 아빠 입 속으로 들어간다는 걸. 그러니까 눈치 없이 맛있는 거 시켰다고 우걱우걱 먹으며 '자식들 먹는 것만 봐도 아빠는 배부르지' 하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아빠들이나, 글을 읽는 독자의 아빠들도 똑같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친구들이랑 소고기집을 가면, 유부남이 된 애들이 제일 원 없이 먹고 간다. 집에서 아내가 안 챙겨주냐고 물으면 아이들 입에 넣느라 아내도 자신도 먹을 새가 없단다. 그럼 처음부터 많이 시키면 되잖아? 그것도 내 생각 같지 않은가 보다.


 아빠 생각하면 떠오르는 게 이렇게 많았던가. 어릴 적 우리가 살던 오래된 아파트는 주차난이 심했는데 외출을 했다 비가 오거나 추운 날이면 아빠는 항상 엄마와 딸 둘을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멀리 공터를 찾아 차를 주차하고 혼자 비도 맞고 바람도 맞으며 들어오곤 했다. 어쩐지 그건 내가 아무리 커도 아빠를 대신해 줄 수 없을 것 같다. 아빠에게 받은 최고의 따뜻함이 아니었나 싶다. 세월이 많이 흘러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면 왠지 그 장면이 많이 생각날 것 같다. 우리 모두 집으로 들어와 손 씻고 기다리고 있으면, 주차 자리를 못 찾아 아파트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던 아빠가, 한참 후에야 후다닥 대문 열고 들어와 몸 녹이고 손 씻으러 화장실 불을 켜고 들어가던 모습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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