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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Sep 26. 2021

외할머니에게 50만 원을 꾸었다

 스무 살, 중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이었으니 약 20여 년 전의 일이다. 중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외가댁에 인사를 가니,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 모르게 쌈짓돈을 꺼내 50만 원을 쥐어주셨다.


 우리 외가댁은 경남 진성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짓는 집이었다. 외할머니는 건장하고 날랜 팔다리로 쌀농사를 짓든, 밭에다 고추, 상추, 마늘, 깨 등을 심든,  자두나무, 밤나무, 감나무에서 수확을 하든, 오일장이 서면 장에 나가 판매를 했는데 서글서글한 성격에 말도 재미나게 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은 분이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그 시절 아홉 형제를 낳아서 농사짓는 근성만으로 이모와 외삼촌들을 키웠다. 엄마의 형제가 무려 아홉이니 시집, 장가를 간 그 자손들이 대체 몇이겠는가? 지금도 사촌들이 결혼을 하고 조카들이 늘고 있는 통에, 우리 식구가 몇 인지 세어보는 것도 크게 의미가 없다. 여하튼 많은 식구가 모이면 왁작왁작 하니 외할머니가 나를 특별히 만져주고 예뻐해 주던 기억도 그리 많이 없다. 정이 많은 할머니 었지만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 사이에 유치원 선생님 같은 거리감이랄까? 나도 외가댁에 가면 냇가에 나가서 사촌들과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외할머니의 관심은 뒷전이었다.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이모들이 어느 날, '혜미가 점점 커가며 엄마를 닮아 예뻐진다'고 했더니 외할머니가 정색을 하며 "지 엄마한테는 쨉도 안되지 지 엄마가 어릴 때 얼마나 예뻤는데" 하셨던 것 정도? 역시 손주보다는 자식이 예쁜 모양이다. 흥.


 외할머니에게 받은 50만 원을 위안화로 환전을 해주며, 엄마는 나중에 성공해서 꼭 할머니 돈 갚으라고 했다. 성공과 관계없이 나는 20대 후반에 어느 정도 고정 수입이 들어오자 외할머니의 돈을 바로 갚아드렸다. 할머니가 나에게 몰래 주셨던 것처럼, 나도 할아버지 모르게 할머니의 쌈짓돈을 제자리에 돌려 드렸다. 그 후에도 가끔 외가댁을 방문할 때 할아버지 할머니 용돈을 조금씩 챙겨 드리곤 했는데 외할머니는 그게 고마웠던지 집에 가려던 나를 불러 세운 후 흙도 안 털어낸 생마늘 한 뭉치나 배추 한 덩이를 안겨주며 서울까지 들고 가서 먹으라셨다. 용돈을 받았으니 뭐라도 줘야겠다며... 정작 나는 밀키트 아니면 요리도 제대로 못하는데 말이다.


 마당에는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있었고 가마솥에는 물이 끊고 있었으며 경작물이 항상 쌓여있던 그림 같던 외가댁에 이제는 소도, 작물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이 집만 덩그러니 남았다. 몇 해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건장하셨던 외할머니도 쓰러져서 지금은 요양원으로 모셨다. 전화를 걸어봐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 "아, 있잖아요, 그때 중국 간다고 50만 원 꿔 주셨던 혜미!" 원래 빌려준 사람은 안 잊는 거 아닌가? 이리 저리 말해봐도 몰라본다.

 외할머니는, 내가 베이징에서 유학했을 적에 쓰촨 대지진 뉴스를 보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무사한 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베이징에서 쓰촨까지는, 우리나라를 통째로 넘는 거리인데... 또한 통영 앞바다에 고깃배 조난 소식이 있으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혹시 낚시 좋아하는 아빠가 바닷가에 나간 건 아닌지 걱정 하는 거다. 관심 없는 듯하나 혼자 그 많은 대가족을 다 마음 써서 챙겼던 할머니가 몸져 누으실 때까지 나는 언제 관심 한 번 있었나. 할머니는 매일밤 저녁이 되면 손을 빌며 기도를 했는데, 제일 큰이모네집 식구들부터 순서대로 하나하나 이름을 외며 매일밤 자손들의 무사평안을 비는 것이 일과의 마무리였다고 한다. 자식 아홉에 아들 손자며느리까지 100여 명이 되는 식구들을 두루 챙기던 할머니가 이제는 몸져누워서 용돈을 보내드려도 소용이 없고, 맛있는 걸 가져다 드리고 싶어도 요양원에서 나오는 간식 외에는 드실 수가 없단다.


 쌀농사를 많이 하는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를 오고 보니 사시사철 쌀농사 짓는 동네 사람들의 땀방울이 눈에 밟힌다. 기계도 기술도 없이 온전히 허리 구부려 모종 하나하나를 심은 그 시절의 외할아버지의 쌀밥은 늘 한 톨도 남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추수의 계절이 오고 명절이 다가오면 100명이 넘는 손님이 오가던 정신없는 외할머니 집이 생각나고, 코로나로 요양원 방문마저 쉽지 않은 혼자 있을 외할머니가 가장 마음쓰인다.

 그랬었지. 진작 더 잘할걸. 생각 하면서도 일찌감치 할머니가 건강하실 때 마음의 빚을 갚아드려서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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