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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Dec 20. 2020

시집가지 말라고 해줘서 고마워

 할머니와 친하다. 어릴 적에 아빠는 나에게 매주 수요일이면 할머니에게 전화를 하라고 시켰다. 정작 아빠는 전화를 자주 하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와의 통화가 익숙한 나는 한 번 전화기를 잡으면 30분씩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한다. 몇 년 전부터인가 할머니와의 통화는 늘 "좋은 사람 있으면 만나 보고... 빨리 시집 가야제"로 훈훈히 마무리된다. 할머니가 통화 내내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집안의 가장 맏언니인 내가 시집을 안 가서 동생들이 줄줄이 시집 장가를 못 가고 있는 것이란다. 무엇보다 첫 손주였던 내가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하게 예식장에서 입장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시는 마음 나도 안다. 할머니가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물으면 만나는 사람 아주 많다며 우스갯소리처럼 넘어갔는데 나이가 점점 차자 이것도 통하지 않는다. 심각하게 얘기하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아빠도 시집 안 가고 혼자 살아도 좋다고 했어요. 우리 세대에는 결혼 안 하는 사람도 많아요." 했다가 아빠까지 쌍으로 욕을 들었다. 나에게 욕을 못 한 할머니는 괜히 아빠를 핑계 삼아 특유의 억양 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무슨 애한테 그런 쓸데없는 말을 씨부리냐"며 내 귀에 대고 윽박지르셨다.


 부모님의 속마음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무심한 듯 딸의 결혼 여부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부모님 덕에 압박 없이 여태 싱글라이프를 즐기며 살고 있다. 엄마는 우리가 자라날 때부터 딸들이 어딘가의 구성원이 아닌 독립 개체로서 이름 석 자 걸고 당당히 살길 바라셨고 아빠는 한동안 언제 시집가냐 물었지만, 혼자 즐겁게 하고 싶은 것 모조리 하고 사는 딸의 모습을 보더니 언젠가부터 우리 입장을 지지해 주셨다. 부모님 연배면 시집 안 가고 있는 딸이 골칫덩어리라 여길 수도 있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친구, 친척들이 부러울 수도 있는데. 딸들이 시집 안 가냐는 주변의 물음에도 쿨하게(혹은 쿨한 척?) 딸들 편을 들어준다.

 덕분에 한 해 한 해를 그저 즐기며 살 수 있다. 주말과 명절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고 퇴근 후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일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결혼을 선택할 수도 있고 이렇게 쭉 혼자 살 수도 있다. 다만 우리 나이 대가 되면 듣게 되는 질문들 - 결혼은 언제 하니, 왜 안 하니-와 같은 것에서 자유로워지면 얼마나 여유로운 30대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지 모른다. 아직 젊어서 에너지도 충분하고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20대보다 나아진 살림에 사고 싶은 건 크게 고민하지 않고 덥석 살 수 있고, 그리고 실컷 연애하고. 이제야 내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되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확실히 알고 즐길 수 있을 때 딱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지금의 시간이 그저 소중하다.

 

 스무 살이 되어 베이징으로 유학을 갔다. 네 식구 복작거리던 좁은 집에서 나와 처음으로 나 홀로 살아보게 되었다. 2인실 기숙사로 배정이 되었다. 나의 룸메이트는 미얀마인이었다. 정말 설렜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자유, 게다가 낯선 나라의 외국인과 한 방을 쓰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들이 많이 생길까.

 일주일만에 환상은 깨어졌다. 나의 룸메이트는 무척 순수하고 착했다. 하지만 우린 둘 다 중국어가 부족했고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기에 답답했으며, 기숙사들이 으레 그렇듯 방이 좁아 잠자기 전에 소등하는 시간도 함께 정해야 했다. 어릴 적부터 혼자 산 적은 없어도 내 방이 있었던 나에겐 너무나 생경한 생활이었다. 같은 여자끼리도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룸메이트가 있을 때에는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고 미처 내가 그렇게 예민한 지 이전에는 몰랐는데 옆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도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미얀마 아가씨는 무척 친절했다. 내가 국제전화를 잘 걸지 못하거나 식당에서 식권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나를 돕고 싶어 했는데 그럴 때마다 겨우 인사말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우리의 중국어로는 성질 급한 경상도 여자인 나를 답답함의 초절정으로 몰고 갔다. 게다가 이슬람이었던 친구는 아침저녁으로 침대에서 큰 절을 하며 기도를 했다. 함께 사는 것에 대해 불편함이 하나씩 느껴지자 기도를 하는 친구의 모습에도 괴리감이 느껴졌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나 2인실은 죽어도 못 쓰겠어요."

 룸메이트뿐만이 아니라, 한국인도 많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유학생 기숙사에 신입생으로 들어갔으니 끌려다녀야 할 일도 많고 이러쿵저러쿵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은 또 어찌나 많았던지. 이대로 있다가는 중국어보다 한국어 실력이 더 늘 것 같았다. 한 달 만에 기숙사를 박차고 나와 아파트를 구했다. 아빠는 그런 것도 못 견디고 나와 사냐며 단체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성향은 20살 이후로 꾸준히 이어져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혼자 사는 삶을 무척 즐기고 있다.

 그런 우리 집에 아빠 엄마가 얼마 전 말없이 쳐들어 왔으니, 내가 그 이후로 부모님의 급 방문에 관한 꿈을 세 번이나 꿨다 무려.

https://brunch.co.kr/@wushuwriter/45

 참,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 룸메이트는 후에 고국으로 돌아가 미얀마 탁구 국가대표선수가 되었다.


 외로워서 혼자 살면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사람들을 만나며 에너지를 받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나는 혼자서 조용히 사색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이다. 누군가와 붙어 있으면 금세 기운이 빠진다. 집에 들어왔을 때 불 꺼진 어둠은 두렵지 않으나 정신 산만하게 집이 어질러져 있거나 원치 않게 티비 소리를 들어야 하면 쉽게 지친다.

 아침에 일어나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책을 뒤적거렸다가 글을 끼적거렸다가 청소기 한 번 돌리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아 행복해'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출근 전 매일 아침 하는 리츄얼이다. 안방 침대 발치에 무려 65인치 티비를 걸어 놓았는데, 잠들기 전 좋아하는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거나 주말에 영화 한 편을 보면 기가 막히다. 새벽 늦게까지 볼륨 소리 줄이지 않고 영상을 본다거나,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주방에서 마음껏 달그락 거릴 수 있는 자유로움. 아빠 엄마가 있는 집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감수했던 불편함이었다.

 그래서 비혼 주의냐고? 글쎄 결혼을 안 하겠다고 굳게 다짐한 적은 없다. 다만 지금의 생활이 너무 행복하고 더 행복한 무언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흘러가는 대로 나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이 있을까. 고3 때 남들 다 치는 수능을 치지 않았고, 대학 졸업 후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지 못했던 예전의 나처럼 세상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기준에는 맞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어필할 수 있는 나의 장점 한 가지는 "지금 내 생활의 월화수목금토일 모두가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이다. 이렇게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말없이 지지해 주는 부모님에게 고마운 마음이 이따금씩 든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회 분위기 속에서 비혼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기껏 쌓아 온 커리어를 결혼과 동시에 몽땅 포기해야 했던 엄마 세대와 비교하면 나는 복 받은 세대임에 틀림없다. 엄마 몫까지 더욱 멋지게 살아내서 엄마가 날 보며 대리만족을 할 수 있도록 해야지. 그리고 내가 부양해야 하는 내 가족, 내 자식이 없을 때 그 힘을 더욱 나의 부모님에게 각별히 쓸 것. 그리고 지금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쓸 것. 이것이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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