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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May 16. 2021

엄마가 없어도 괜찮은 인간이 되었다

 부모님 집에 자주 드나들다 최근 2년간 가는 횟수를 줄였다. 바이러스를 옮기면 안 되니까. 듣기 좋은 핑계였다. 시골로 이사를 했기 때문도 한몫했다. KTX 역이 멀어지니 도시로 나가 기차를 타고 창원에 도착해서 택시를 갈아타고 집으로 가는 일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시골이 벗어나고 싶지 않은 곳이어서, 시골의 주말이 너무 좋아서 안 간 이유도 사실 있다. 나 대신 해외에 유학 갔다 돌아온 동생이 부지런히 집에 내려가 주었다. 의무로 하던 효도를 하지 않으니 편했다. 내가 워낙 안 내려가니까 한 번은 부모님이 집에 쳐들어 왔다. https://brunch.co.kr/@wushuwriter/45 자주 들락거리던 애가 발길을 딱 끊었으니 혹시 남자 친구가 생긴 건 아닌가 잘 살고 있는 거 맞나 불시에 검문을 하러 온 것일 수도 있겠다. 


 이제 곧 엄마가 나를 키웠던 시간보다 나 혼자 살았던 시간이 길어질 테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던 아이는 한 해 한 해 커 갈수록 엄마보다 재밌고 좋은 것들이 많아지고 점점 엄마가 없어도 괜찮은 인간이 되었다. 엄마를 생각하면 당연히 가슴 아련하고 그렇다고 크고 난 후에 예전보다 엄마를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릴 적처럼 엄마 손이 필요하지 않고 오래 떨어져 있어도 그립지 않으니 이렇게 점점 멀어져 간 엄마가 훗날 내 곁을 떠나가도 크게 엉엉 울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스무 살 때 집을 떠나 베이징으로 유학을 갔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 많이 울었다. 집에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다. 영상통화나 메신저 따위는 언감생심이었고. 집에 전화를 하고 난 후 자주 울었고, 시험 성적을 잘 못 받으면 그게 뭐라고 통화하는데 또 목이 메었다. 졸업 후 성적 보일 곳도 아무 데도 없었는데 왠지 부모님은 열심히 돈을 부치는데 나는 내 본분을 열심히 못 했다는 생각에. 좀 더 행복하게 즐겁게 유학생활 즐겼으면 되었을 걸. 

 그런데 대학교 3학년 때 1년가량 서울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을 받게 된 것이다. 비행기 타고 훌쩍 날아갈 수 없었던 집을, 버스만 타면 비행기 값에 견줄 수 없이 저렴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선수촌에서는 금요일 저녁부터는 이틀간 외박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대부분은 주말에 남아 쉬거나 다른 선수들과 삼삼오오 놀기도 했는데 난 꼭 집에 내려갔다. 지하철 1시간, 시외버스 4시간 30분, 택시 20분을 갈아타고 갈아타서 늦은 밤에 겨우 집에 도착했다. 엄마가 깨끗이 빨아놓은 향긋한 침대 시트에 코를 묻고 엄마가 해 준 밥을 먹고 나면 다음 일주일을 버틸 수 있었다. 선배들이 집에 내려가는 것이 맞냐며, 이렇게 매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내려가는 것을 보면 숨겨둔 애인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놀릴 정도였다.

 졸업을 하고 서울에서 정착하며 일을 시작했다. 가내수공업처럼 시작한 나의 사업은 사무실 월세를 따로 낼 여력이 되지 않아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겸해서 지냈다. 몇 번의 이사를 하며 큰 평수로 옮겨봐도 늘어나는 짐과 드나드는 직원과 손님 때문에 집이 집 같은 아늑함이 하나도 없었다. 자꾸 우리 집은 창원에 있는 것 같아 연휴가 생기거나 길게 쉴 일이 생기면 창원행 KTX를 끊곤 했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점점 단단해졌고 무던해졌다. 짐과 함께 오피스텔에 기거하는 세월이 길어지니 내가 짐짝인지 인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사무실을 분리하고 아파트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시점이 내가 진정으로 집에서 독립하는 때였던 것 같다. 그제야 사는 게 사는 것 같아졌다. 집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하나씩 채워 가고 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했다. 거실을 서재로 만들어 좋아하는 커피를 내려 마시고 안방 침대 발치에 큰 티비를 놓고 보며 잠들고 욕조 가득 물을 받아 그렇게 좋아하는 거품목욕을 하고 사니 내 집이 내 것 같았다. 아주 사소한 차이였는데. 비로소 엄마 집에 가는 것이 조금 귀찮아졌다. 급기야 엄마 집을 외박이라 부르며 세상 어디보다 우리 집이 편하다고 하게 된 것이다. 엄마와 떨어진 지 15년이 지나고 난 35살 즈음되어서의 일이다. 집 떠나 15년을 집을 그리워하고 집에 돌아갈 생각만 하다가 드디어. 

 엄마가 매우 필요하다가 엄마 손이 그리웠다가 점차 나의 생활에 만족을 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엄마와 거리를 두고 살면서도 아쉬운 줄 모르고 그리운 줄 모르고 사는 것이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요즘은 아빠가 집에 내려오라고 하는 날도 잦다. 원래 자식에게 크게 기대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분이었는데. 가끔은 아빠가 우리에게 관심이 있기나 한가 싶을 때도 있었는데 아빠도 나이가 든 건지, 아니면 내가 나이가 드는 것이 조급해진 건지.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며칠 우리가 집에 있다 오면 서운해하기도 하고 또 그런 표현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기도 한다. 전형적으로 표현 한 번 못 하던 경상도 아빠였는데. 예전엔 내가 아빠 엄마 뒤꽁무니를 지겹도록 쫓아다녔는데, 이제는 난 괜찮은데 부모님이 나를 찾는다. 

 이번 아빠 생신 때도 집에는 동생만 내려가고 나는 선물만 보냈다. 아직도 아빠는 내가 걱정이다. 시골에서 심심하지 않은지 힘들지 않은지 물어보는데 왠지 이번에 한 나의 대답이 큰 효도를 한 것만 같다. 

 "아빠, 나 요즘 사는 게 너무 좋아요. 어른이 되면 이렇게 살기 좋아지는지 정말 몰랐어요. 일도 재밌고 학교 과제도 해야 하고 (방통대 재학 중) 글도 쓰고 운동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고 개도 돌봐야 하는데 다 보람 있어요. 월화수목금토일이 다 좋아요. 그리고 두고 보세요. 이렇게 열심히 해서 언젠가는 우리 회사도 나이키를 넘어서게 볼륨을 키울 거예요."

좀 전까지 걱정하던 아빠의 목소리가 한 톤 안심되는 것 같이 들렸다. 

'호오~ 그래? 그렇게 원대한 꿈도 있었냐?'(나이키가 되길 기대하는 목소리였을까? 아이들은 원래 부모가 생각도 못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전화를 끊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부모님에게, 사는 게 너무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하게 들렸을까 싶다. 아마 그날 밤 아빠는 두 발 편히 뻗고 주무셨겠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자주 오지 않아도 나는 정말 120%를 즐기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혼자서 씩씩하게. 부모님 없이도. 

 

 아직 나는 엄마 없으면 못 산다. 그렇지만 엄마가 없어도 살 수 있도록 드디어 엄마로부터 몸과 마음이, 경제적으로, 모든 면에서 독립한 것 같다. 가끔은 엄마가 그립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엄마가 없어도 괜찮은 인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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