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요, 도시바.

일상생활

by 소박하며화려한

설마 했는데 역시나 노트북의 수명이 다하였다.


까만색의 투박하고 무거운 옛날 디자인이지만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지 않던 시절을 잘 보내게 해 주었다. 머리맡에 두고 자다가 아이들이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용산에서 액정도 두 번이나 갈았던 나의 노트북. 사진 파일을 열어보면 학사모를 쓰고 웃고 있는 나부터 학부모가 되어있는 시절의 나까지 모든 시절을 알고 있는 나의 노트북.


떠나보내야 할 때를 잘 알고 아름답게 헤어지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바탕화면에 저장한 세 편의 짧은 소설을 옮겨오지 못해 노트북이 켜질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 전원이 들어올 때도 간간히 있어 조금 더 쓰겠다고 버텨온 것이 잘못이었다. 버튼을 눌러봐도 불은 들어오지 않는다. 어댑터를 다른 것과 바꾸어 끼워보기도 하고 전원 버튼을 여러 번 다시 눌러보기도 한다. 애타는 마음과는 반대로 까맣게 반응 없는 화면. 조급한 나에게 노트북은 답을 해주지 않는다.

어지간한 불편함도 참고 넘어가는 나는 얼마나 미련한 성격인지. 이제는 하루에 한 번씩 전원이 들어오는지 확인하는 것이 정해진 일과다. 작별인사를 준비하는 것보다 급하게 새로운 사양의 것을 찾아보기에 바빠졌다. 그간 어렵게 쌓아놓은 글들을 구해낼 방법이 없다. 그나마 증상이 덜할 때 버릴 때가 되었음을 빨리 인정하고 헤어지는 준비를 했어야 한다.


디자인 작업을 할 수 있는 노트북을 찾다 보니 가격이 점점 올라간다. 중고와 새 제품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한 번에 현금을 목돈으로 쓸 것인지 카드가 남겨준 유용한 제도인 '할부'를 장기간 이용할 것인지 고민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긴 시간을 나누어 돈을 지불하기로 약속하는 것은 썩 내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상금을 털자니 계획은 없어도 돈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진다. 단기 알바라도 없나 싶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에 어플이 하나 생긴다. 알바들과 고용주들의 천국인 바로 그 어플. 꿀벌 그림이 웃고 있는데 마음은 왠지 유쾌하지가 않다.


돈 앞에서는 자존심도 없냐고 비아냥대던 나인데 겪어보니 돈이 가진 힘은 자신보다 클 수도 있겠다. 마음속 비난을 받아야 했던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사이가 안 좋은 큰집에서 얼마 전 명의를 빌릴 수 없겠냐고 연락이 왔었다. 빌려주는 값과 길게 보면 연말정산까지 기대할 수 있는 거래. 자존심에 관심 없는 척했지만 그 후로 답변 없는 아주버님의 근황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궁금하다. 사업에 무슨 차질이라도 생기신 건 아닌지. 수고비로 주겠다던 금액이 최신형 노트북의 가격과 맞아떨어지는 이 운명의 장난까지. 밖에 쏟아지는 장대비만큼 마음이 소란스러운 밤이다.


정든 물건과 헤어지는 것도 새로운 것을 만나는 일도 이렇게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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